의정부 참정 신기선의 상소 (5) 

홍릉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능)
홍릉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능)

1904년 12월 31일에 신기선이 올린 세 번째 사직 상소는 계속된다. 

“백성들의 원한이 극도에 이르렀으나 하소연할 데가 없게 되었고, 그것이 처음 변란인 임술년(1862)의 소요를 초래하였고 두 번째 변란으로 갑오년(1894)의 난리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나라에서는 비로소 개혁을 도모하며 유신(維新)을 표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루어진 버릇이 고쳐지지 않았고 인심은 날이 갈수록 엷어지고 있습니다. 대소 관리들은 전날보다 몇 곱절 더 제 이익만 채우며 공적인 것을 모두 잊고 폐하를 속이며 법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채수(債帥)와 묵리(墨吏)들은 백성들을 물고기 잡듯이 등골을 긁어내고 파견 관리와 시찰 관리들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빙자하여 기회를 타서 남의 재물을 빼앗고 있습니다.

경무(警務)를 맡은 두 관청과 옥을 맡은 관리들은 요민(饒民)에게서 포악하게 약탈하여 온 나라를 함정으로 만들고 있으며 각 진위대(鎭衛隊)의 군사들은 비적(匪賊)을 핑계 대고 백성들을 침해하고 있습니다. 

각궁(各宮)과 각사(各司)에서는 잡세(雜稅)를 함부로 받아 내고 서경(西京)의 궁(宮)을 짓는 역사(役事)에 도(道) 전체를 모조리 긁어내어 고갈시켰습니다.

전환국(典圜局)은 악화(惡貨)를 주조하여 물가를 등귀시키고 있으며 내장원(內藏院)에서는 역참(驛站)의 둔전(屯田)을 관할하면서 농민들을 들볶고 있습니다.”

악화 주조는 ‘백동화(白銅貨) 파동’이었다. 1900년 이후 내장원 소속이 된 전환국은 고종의 의향에 따라 백동화를 대량 주조하여 황실에 납입하는 기구로 변질되었다. ‘전환국은 황제의 전환국’, ‘화폐도 황제의 화폐’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 정도였다. (연갑수외 2명, 한국근대사 1 국민국가 수립운동과 좌절, 푸른역사, 2016, p 202-203)

그런데 유통된 백동화는 전환국에서 주조한 것 이외에도 민간이나 외국인에 의한 위조(僞造), 또는 외국에서 밀수입된 것도 상당액 포함되어 있었다. 백동화의 대량 주조와 위조, 외국으로부터의 밀수입은 국내 통화량을 더욱 증가시켜 화폐가치를 급속도로 떨어뜨렸다. 1901년 7월 이전에는 쌀 한 되 가격이 1냥 내외이던 것이 1901년 말에는 7냥 수준으로 7배가량 올랐다. 이러자 상거래는 마비 상태에 이르렀고, 국민 생활은 도탄에 빠졌다. 

아울러 황실 재정의 핵심 기관인 내장원은 1899-1901년에 걸쳐 대대적인 역참 둔전 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농민에게 고율의 소작료를 매겼다. 1901년에 일어난 제주민란(이재수의 난)도 내장원 소속 봉세관이 과중한 조세를 강압적으로 징수하는 과정에서 각종 이권을 프랑스인 신부와 천주교인에게 내주어 발생하였다.  

“이 밖의 허다한 고질적인 폐단은 시중드는 사람을 교대해가며 말하더라도 다 셀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이 도리어 임술년(1862), 갑오년(1894) 전보다 더 심해졌으니 백성들이 떠들썩하게 일어나 분연히 모여 살아날 길을 도모하는 것 또한 괴이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이런 비상한 변고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변고는 곧 백여 년 동안 차근차근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 마침 폐하의 조(朝)에 이르러 터졌으니 신은 통탄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처럼 비상한 변고를 당하게 되었으니 반드시 비상한 뜻을 품고 분발해서 비상한 인재를 등용한 다음에야 위태로움이 안정으로 변하고 조종(祖宗)의 정사 체제를 복구하고 비상한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매번 폐하 앞에 나설 때마다 적이 폐하의 뜻을 헤아리고 개연히 분발해서 어려운 형편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변변치 못한 신이 어찌 외람되게 의정부의 벼슬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 누구보다 어리석고 나약하기 때문에 아첨이 풍속이 되고 신하가 폐하의 위엄을 무릅쓰고 바른 말로 간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지내는 것이 정상이 되어 있어 신은 일을 과단성 있게 처리하지 못합니다.

사변이 들이닥쳐도 망연해져 어쩔 줄 모르고 폐단을 바로잡을 계책이란 늙은이가 늘 하는 푸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 바라건대 폐하는 속히 신의 벼슬을 체차(遞差)하고 유능하고 식견 있고 명망 높은 인재를 정석(政席)에 두어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다 좋게 하소서."

마침내 고종은 사직을 받아들였다. 

"바로잡을 생각은 없이 벼슬에서 물러나겠다고만 하면 끝내 그 책임은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그러나 이처럼 간절히 사임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라." (고종실록 1904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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