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이토 히로부미와 독대하다 (4) 

고종의 국외 중립선언 (덕수궁 중명전 전시물)
고종의 국외 중립선언 (덕수궁 중명전 전시물)

1905년 11월 15일 서울 정동 수옥헌(지금의 덕수궁 중명전), 오후 3시 부터 시작된 고종 황제와 이토 히로부미의 단독 면담은 2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이토가 건네준 협약 초안을 몇 번이나 살펴본 고종은 이토에게 외교 형식이라도 보존해 달라고 매달렸다.

고종 : 일본 정부의 충언은 결코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다만 그 형식을 어느 정도 갖추는 데 경의 알선, 진력을 기대한다. 경이 짐의 절실한 희망을 귀 황실과 정부에 전하면 다소 변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토는 잔인할 정도로 냉혹하게 거절했다.

이토 : 본안은 더 이상 추호도 변통의 여지가 없는 확정안입니다. 단연코 움직일 수 없는 일본 제국 정부안입니다. 오늘의 요점은 다만 폐하의 결심 여하에 있습니다. 승낙하시거나 거부하시거나 하는 것은 폐하의 마음이지만, 만약 거부하시면 제국 정부는 결심한 바가 있어 그 결과는 과연 어느 곳에 이를지… 생각건대 귀국의 지위는 이 조약을 체결하는 것보다 더 심한 곤란한 경우에 처하여 그 이상의 불이익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고종 : 짐이라 할지라도 어찌 그 이치를 모르겠는가? 그렇다고 할지라도 일이 중대함에 속한다. 짐은 지금 스스로 이를 재결할 수 없다. 짐의 전 · 현직 정부 신료와 상의하여 자문을 구하고 또 일반 인민의 의향도 살필 필요가 있다.

이토의 의중을 확실히 파악한 고종은 이제는 거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약자의 처지인지라 강력하게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고종은 전·현직 정부 신료와 상의하여 자문을 받고 일반 인민의 의향을 살필 필요가 있다고 언급함으로써 우회적으로 거절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이를 모를 이토가 절대 아니었다.

이토 : 폐하께서 정부 신료와 상의하심은 당연하시오며 외신(外臣)도 역시 결코 오늘로 결재하심을 청하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반 인민의 의향을 살핀다는 운운의 말씀에 이르러서는 기괴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귀국은 헌법 정치도 아니며 만기 모두 다 폐하의 친재(親裁)로 결정하는 소위 전제군주국이 아닙니까?
 그리고 인민의 의향 운운이라 했지만 필시 이는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의 제안에 반항을 시도하려는 생각이시라 추측됩니다.

그랬다. 대한제국은 전제 군주국이었다. 1898년 말에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킨 고종은 1899년 8월 17일에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를 제정 반포했다.

대한국 국제는 왕권의 전제화를 꾀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무한 불가침의 군권을 향유하여 입법·사법·행정·선전(宣戰)·강화·계엄·해엄에 관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를 읽어보자.

제1조

대한국(大韓國)은 세계만국에 공인된 자주독립한 제국(帝國)이다.

제2조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정치는 과거 500년간 전래 되었고, 앞으로 만세토록 불변할 전제정치(專制政治)이다.

제3조

대한국 대황제(大皇帝)는 무한한 군권(君權)을 지니고 있다. 공법에 이른바 정체(政體)를 스스로 세우는 것이다.

제4조

대한국 신민이 대황제가 지니고 있는 군권을 침손(侵損)하는 행위가 있으면 이미 행했건 행하지 않았건 막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인정한다.

제5조

대한국 대황제는 국내의 육해군(陸海軍)을 통솔하고 편제(編制)를 정하며 계엄(戒嚴)과 해엄(解嚴)을 명한다.

제6조-제8조 (생략)
 
제9조

대한국 대황제는 각 조약국에 사신을 파송 주재하게 하고 선전(宣戰), 강화(講和) 및 제반 약조를 체결한다. 공법에 이른바 사신을 자체로 파견하는 것이다. (고종실록 1899년 8월 17일)

이처럼 대한제국은 고종 1인의 나라였다. 고종이 만기친람(萬機親覽 임금이 모든 정사를 친히 보살핌)하는 절대주의 전제국가였다. 고종은 러시아의 차르와 유사한 길을 걸었다. 대한제국은 영국, 프랑스나 미국의 근대 민주국가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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