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체결 (3)     

을사늑약 무효화 투쟁 (덕수궁 중명전 전시물)
을사늑약 무효화 투쟁 (덕수궁 중명전 전시물)

 1905년 11월 17일 늦은 밤, 이토는 대신들과의 찬반 문답이 끝나자, 궁내부 대신 이재극을 불러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지시를 받아 각 대신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반대한다고 확실히 말한 사람은 오직 참정대신과 탁지부 대신뿐이다. 찬성 6인, 반대 2인으로 가결이 되었으니 주무 대신에게 지시를 내리시어 속히 조인(調印)하도록 주청해 달라.”고 말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가결을 선언하자, 참정대신 한규설은 의자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모양을 지었다. 이러자 이토가 제지하며 짜증스럽게 “어찌 울려고 합니까?”라고 말하였다. 

이후 한규설과 박제순은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아 있었고, 민영기,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이근택, 이하영은 조약 문안을 수정하는 문제로 설왕설래하는 바람에 회의장은 다소 어수선해졌다. 

이때 한규설이 밖으로 나갔다. 그는 예식관 고희경을 시켜 고종의 알현을 청하고, 대청 뒤 작은 방으로 들어가 다시 이재극에게 알현을 요청했다. 이 때 고희경이 일본공사관 통역 시오가와가 참정대신을 만나고 싶다고 전했다. 한규설은 앞뜰로 나갔는데 시오가와가 달려들면서 한규설의 왼팔을 잡고 일본 헌병 5명이 위협하며 휴게실 서쪽의 작은 방으로 끌고 가 감금시켜 버렸다.  

한참 있다가 한규설이 회의실로 다시 들어왔다. 한규설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슬프게 통곡하자 회의는 잠시 중단되었다. 

이때 이토는 “너무 떼를 쓰는 모양을 하면 죽이겠다.”며 모두 들으라는 듯이 엄포를 놓았다. 대신들은 겁에 질렸고 이후 조약체결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문안 수정이 끝나자 이토는 각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참정대신 한 사람이 반대할 지라도 다른 대신들은 수정안건에 모두 찬성하였으니 이 안건은 결정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이토는 일본 공사관의 통역 마에마 교사쿠와 외부 보좌원 누마노 등과 일본군인 수십 명으로 하여금 외부(外部)로 달려가서 외부대신의 직인을 탈취하도록 한 다음, 박제순과 하야시가 나란히 조약에 날인했다. 조인된 시간은 11월 18일 오전 1시경이었다. 

그런데 1905년 11월 18일의 「윤치호 일기」에는 외부의 직인은 일본에 의해 탈취당한 것이 아니라 외부대신 박제순의 명령에 의해 외부(外部) 직원이 수옥헌(지금의 덕수궁 중명전)에 가져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8일 《토요일》

제대로 잠들 수 없는 밤을 보낸 뒤 조선 독립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러 일찍 외부(外部)로 나갔다. 

외부에서 숙직했던 신주사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魚) 씨와 내가 어젯밤 10시쯤 물러가서 잠잘 준비를 했습니다. 우리는 그 조약이 그렇게 바로 서명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어제 온종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예민해졌습니다. 10시가 조금 지나 전화가 울렸습니다. 

전화를 받자 외부대신 박제순이 ‘인궤(印櫃)를 들여보내시오’ 하고 말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인궤는 보좌부에서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즉시 외부대신의 전갈을 김 주사에게 보냈는데, 김 주사는 오지 않았습니다. 밤이 깊어졌고, 계속해서 김 주사에게 전령을 보냈습니다. 

일본 공사의 통역관 마에마 씨가 궁에서 와서 인궤를 달라고 재촉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조바심을 냈습니다. 

외부 교섭국장 이시영(李始榮) 씨가 왔습니다. 우리, 즉 어 씨와 이 씨, 그리고 나는 상의한 뒤 인궤를 보내지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이시영이 궁내의 분투한 결과를 알기 위해 박제순 대신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박 대신이 대답했습니다. ‘다 잘 되었으니 인궤를 들여보내시오.’ 이 말을 듣고 우리는 인궤를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궁으로 인궤를 가져다 줬습니다. 

일본군이 외부의 중앙복도에서부터 궁 안의 내각 회의실까지 두 줄로 빈틈없이 길을 호위했습니다. 내각 회의실에는 굉장히 많은 일본인들과 조선인 관료들이 모여 있어서 누가 누군지 거의 구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박제순 대신과 하야시가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앉아 있는 모습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조약서가 그 탁자 위에 있었고, 인궤를 박 대신에게 건네주자마자 즉시 서명이 이루어지고 날인이 되었습니다. 그 뒤 다시 일본군 횡렬을 뚫고 외부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새벽 1시에서 2시쯤 서명을 통해 조용히 조선의 독립은 포기되었다.”

외교권을 강탈당한 대한제국은 국제적으로는 독립국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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