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명, 이상설의 상소 

을사늑약 강제체결 일지 (덕수궁 중명전 게시)
을사늑약 강제체결 일지 (덕수궁 중명전 게시)

을사늑약이 체결된 다음 날인 1905년 11월 19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궁내부 특진관 이근명이 상소를 올렸다. 

"신은 어제 정부가 조약을 체결한 일에 대해 너무나 놀랍고 의심스러워 줄곧 근심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 문제입니까? 조정에 물어서 협의하여 타당하게 처리하여야 할 것이었으나, 바로 한 밤중에 대궐에서 그 누가 알까 두려워하면서 부랴부랴 회의를 열어 이렇듯 체결하여 일을 크게 그르쳤습니다. 

이것은 지금 모든 사람들의 울분을 터뜨렸을 뿐 아니라 실로 천하의 영원한 죄인으로 되었으며 또 국법으로 볼 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황상(皇上)께서는 빨리 처분을 내려 그날 회의한 모든 대신(大臣)들을 모두 법에 따라 처벌하심으로써 온 나라의 한결같은 울분을 풀어 주소서."

이에 고종이 비답하였다. 

"대체로 경은 노숙한 사람으로서 나라일을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지성을 가지고 있어 물론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역시 그 일에 어찌 헤아린 점이 없겠는가? 경은 양해하라." (고종실록 1905년 11월 19일)

이근명이 조약이 밀실에서 부랴부랴 체결된 것에 분노하면서 회의에 참석한 대신을 처단하라고 했는데 고종은 널리 양해하라고 비답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종의 이중성이었다. 고종은 조약 체결에 반대한 총리대신 한규설을 면직시키고서, 11월 18일에 사직상소를 올린 법부대신 이하영과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사직상소는 반려한 상태였다.
 
한편 1905년 11월 1일에 의정부 회의 실무를 총괄하는 의정부 참찬에 임명된 이상설(1870∽1917)은 11월 18일 오전 2시에 참정대신 한규설이 풀려나자 참정대신과 손을 맞잡고 통곡하면서 망국을 슬퍼했다. 즉시 그는 사직 상소를 올렸다. 

11월 19일에 이상설은 고종의 비준 절차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다시 상소를 올렸다.

“엎드려 아뢰옵나이다. 신이 어제 새벽 정부에서 일본과 약관을 체결하여 마침 조인까지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르기를 천하 대사를 다시 어찌할 수 없구나 하고 사저로 돌아와 다만 슬피 울고 힘써 자정(自靖)하기를 도모하고자 상소 진정하여 면직을 바랐습니다. 

이제 듣자오니 그 약관이 아직 주준(奏准)을 거치지 아니하였다 하니 신의 마음에 위행(慰幸)이 가득하고, 국가를 위해 계책을 아직 세워볼 만하다고 기뻐하였습니다.  

대제 약관이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하지 않아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사직을 위해 죽는다.(殉社)’는 뜻을 결정하여 단연코 거부하여 역대 조종이 폐하에게 맡기신 무거운 임무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중략) 폐하께서 만약 신의 말이 그르다고 여기시거든 곧 신을 베어서 여러 도적에게 사과하시고, 신의 말이 옳다고 여기시거든 곧 여러 도적을 베어서 국민에게 사과하소서. 신의 말은 이뿐이오니 다시 더 말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
(김삼웅 지음, 보재 이상설 평전, 채륜, 2016, p 60-61, 
 박민영 지음, 이상설 평전, 신서원, 2020, p 78-79)

이상설은 고종에게 노골적으로 분사(憤死)하라고 상소하였다. 조약을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아니하여도 나라는 또한 망하니, 이럴 바에는 황제가 차라리 죽음을 택하여 저항하라고 주청했다. 이처럼 신하가 임금에게 사직을 위해 죽으라는 상소는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러자 11월 24일에 「대한매일신보』는 ‘이상설의 상소문(讀李參贊疏)’을 신문에 게재하고 ‘자고로 난세를 당하여 직신(直臣)의 간언은 있었지만 막중한 군부의 죽음을 끊는 순사직(殉社稷)을 간한 신하는 이상설에게만 있었던 충언’이라고 극찬하였다.  

나중에 이상설은 1907년 헤이그 특사 대표로 부대표인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을사늑약 무효를 전 세계에 알렸다.

저작권자 © 한국농어촌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