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군 하나 없는 대한제국  

중명전 황성신문
중명전 황성신문

1905년 11월 21일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1면에 「황성의무(皇城義務)」란 논설을 실었다.

“어제 황성신문 기자가 일한신조약(日韓新條約)에 대하여 한황 폐하께서 이토 대사의 강청(强請)을 정대하고 명확하게 척절(斥絶 배척하고 거절)하신 칙어와 다수의 일본 병사가 궁궐에 난입하여 용탑(龍榻 임금이 앉고 눕는 침상)에 지척까지 다가와서 위협과 협박을 보인 행동과 이토대사가 참정대신(한규설)에게 공갈도 하고, 유세도 하는 등의 여러 가지 강압수단과 한참정이 그 조약에 날인을 하지 않은 일과 각 대신이 군부(君父)를 속이고 저버리면서 국권을 상실한 죄를 사실에 입각하여 곧게 썼다.

또 해당 조약이 황상 폐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신 일이고, 참정대신이 날인하지 않은 것이니 반드시 무효하다는 설도 게재하고 해당 신문사 기자는 이 신문을 발포하면, 반드시 닥칠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서 일본의 검사도 받지 않고, 아침 일찍 전파하고는 앉아서 변을 기다렸다. 

과연 일본 순사들이 와서 사장 장지연을 잡아가고 해당 신문을 정간시켰다.

오호라! 황성 기자는 단지 해당 신문사의 의무를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로 대한 전국 사회 신민(臣民)의 대표가 되어 광명 정직한 의리를 세계에 발현(發顯)하리로다.

방성대곡(放聲大哭)이라는 논설 한편에 이르러서는 모든 대한 신민이 된자가 통곡하지 않을 수 없거니와, 세계 각국의 모든 공평한 마음과 정의를 가진 자는 모두 마땅히 그를 위해 분개하고 애통해하리니 오호라, 황성 기자의 붓은 가히 일월(日月) 그 빛을 다툴 것이로다. ”
(기획 김홍식/해설 김성희/ 편집 김영선,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 서해문집, 2009, p 30-31)

이어서 <대한매일신보>는 11월 27일에는 호외를 발행해서 1면에는 ‘한일신조약청체전말(韓日新條約請締顚末)’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과정을 상세히 보도했고, 2면에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으로 옮겨 실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영국 런던 데일리뉴스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왔던 영국인 배설(裵說, Ernest Thomas Bethell)이 양기탁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7월 18일에 창간하였는데 주필에는 박은식이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발행인이 영국인인 <대한매일신보>는 일본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이런 기사를 과감히 실었다.

당시에 경성에는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 사설에서 언급한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란 욕이 널리 유행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느 말이 유행인가?

한편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한일보>는 이를 경거망동이라 했고, <제국신문>은 ‘한 때의 분함을 참으면 백년 화근을 면하리라.’는 논설을 실었다. 언론도 언론 나름이라는 말은 예부터 그랬던 모양이다.

여기에서 을사늑약과 관련한 해외 언론 기사를 살펴보자.

11월 20자 영국의 <더 타임즈>는 ‘일본과 한국, 협약에 이르다.’ 제하로 한국의 일본의 협약과정을 보도하면서, ‘한국은 앞으로 극동 지역의 태풍의 눈에서 벗어나 발전의 시대로 진입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영국은 1902년과 1905년에 일본과 2차에 걸친 영일 동맹을 체결한 동맹국으로서 러시아를 물리쳐준 일본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반면에 11월 22일 자 미국의 <뉴욕타임즈>는  ‘사라지는 한국’ 제하의 기사에서 ‘장차 대한제국의 황제는 영국 통치 아래의 인도 국왕의 지위로 전락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와 함께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데 걸림돌은 청나라나 러시아가 아니라 한국 내부’라고 보았다. 

 

전반적으로 영국, 미국 등 열강들이 일본의 한국에서의 권리를 인정하는 입장이어서, 외국 신문들도 일본에 동조하거나 방관적인 입장이었다. 한마디로 대한제국은 우군 하나 없는 사면초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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