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의 자결 

민영환 자결 터 (인사동 공평빌딩 앞)
민영환 자결 터 (인사동 공평빌딩 앞)

 1905년 11월 28일에 시종부 무관장(侍從府 武官長) 민영환 등이 을사늑약을 맺은 대신들을 처벌하라고 상소하였다.
  
"신들이 두 재상의 뒤를 따라 속히 역적들을 처단하고 강제 조약을 돌려보내는 일로 여러번 호소하였지만 아직 유음(兪音)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빨리 처분을 내려 매국 역적들을 처단하고, 강직하고 충성스런 신하를 외부대신으로 임명하여, 성명을 내고 회동하여 담판하게 하소서. 그래야 강제 체결된 조약이 폐지되고 나라가 보존될 것입니다."

이러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이미 여러 번 칙유하였으니 이해해야 할 것인데 왜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구는가? 경들의 충성스러운 말을 왜 모르겠는가? 속히 물러가라."
(고종실록 1905년 11월 28일 3번째 기사)

하지만 민영환 등은 다시 상소하였다.

" (...) 이 소청은 우리 조정에서 우리 법을 시행하여 처단해야 할 자를 처단하고, 사무를 주관할 대신을 골라 임명해서 조약을 폐지하기 위한 방도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나라는 존재해도 망한 것과 같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살펴 시행하소서."

그런데 고종은 "또한 이미 거듭 타일렀는데도 이렇게구니, 이는 서로 믿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라고 비답했다. (고종실록 1905년 11월 28일 
4번째 기사)

이틀 후인 11월 30일 아침 6시에 민영환(1861∽1905)이 자결했다. 45세였다. 11월 29일에 평리원에서 처벌을 기다리다가 석방된 민영환은 다시 소를 올리기 위해 장소를 종로 백포점으로 옮기고 판서 민영규, 김종한, 남인철 등과 내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이 날 오후에 민영환은 서대문 밖에 있는 본가에 가서 생모 서씨와 아내 박씨를 찾아 작별하였다. 그리고 전동 회화 나뭇골에 사는 옛 청지기인 의관(醫官) 이완식의 집(현재 인사동 공평빌딩 앞)을 찾았다.

이튿날 아침 6시경에 민영환은 평소 가지고 있던 작은 칼로 자신의 배와 목을 찔러 순절하였다. 처음에는 복부를 찔렀는데 칼이 작아 깊이 들어가지 않자, 손에 묻은 피를 벽과 의복에 여러 번 문질러 씻고 난 뒤에 다시 찌르고 하였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목을 찔러 두 치 넓이의 구멍을 내어 유혈이 방안에 가득한 채 절명했다. 

민영환의 소매 속에서는 명함 앞뒤로 쓴 유서 2통이 나왔는데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였다. 이 유서는 1905년 12월 1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다. (이 명함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도 복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면 민영환의 유서를 읽어보자. 

먼저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警告韓國人民)’이다. 

“오호라! 나라와 백성이 치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들은 곧 생존경쟁 속에서 진멸(殄滅)되어 갈 것입니다. 무릇 살기를 구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사는 법이니, 제공(諸公)들이 어찌 이것을 모르겠습니까? 영환은 마침내 한 번 죽어 황상의 은혜에 우러러 보답하고, 또 우리 2천만 동포 형제들에게 사죄하고자 합니다. 이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구천 아래에서 제군(諸君)들을 도울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형제 동포들이 천만 배나 더 분발하여 지기(志氣)를 굳건히 하고 학문에 힘쓰며, 서로 죽을 힘을 다하기로 결심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이렇게 죽는 사람도 마땅히 저승에서 기쁘게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럼 이것으로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고별인사를 올립니다.”

이어서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各 公館寄書)’이다.    

“영환은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으므로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또 2천만 동포에게 사죄하옵니다. 죽은 사람은 그만입니다만 지금 우리 2천만 인민들은 곧 생존경쟁 속에서 진멸되어 갈  것입니다. 귀 공사들이 어찌 일본의 행위를 모를 리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귀 공사 각하는 다행히 천하의 공의(公議)를 중하게 여기시고, 이 사실을 귀 정부와 인민들에게 보고하여 우리 인민의 자유와 독립을 도와주신다면, 이렇게 죽는 사람도 마땅히 지하에서 기쁘게 웃으며 은혜에 감격할 것입니다. 아! 각하는 부디 우리 대한을 경시하거나 우리 인민의 뜨거운 마음을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고종은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조령을 내렸다.

“이 중신은 타고난 성품이 온후하고 의지와 기개가 바르며, 왕실의 근친으로서 곁에 가까이 있으면서 보좌한 것이 많았고 공적도 컸다. 짐이 일찍부터 곁에 두고 의지하며 도움받던 사람인데, 이 어려운 때에 강개하고 격렬해져 마침내 자결하였으니, 충성스럽고 의로운 넋은 해와 별을 꿰뚫을 만하다. 짐의 마음의 비통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 의정 대신의 직임을 추증하고, 예식원에서 정문(旌門)을 세우고 시호를 주는 은전을 시행하라. (후략) (고종실록 1905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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