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의 변명 상소 (1) 

               

대한제국과 덕수궁의 역사  (중명전 전시물)
대한제국과 덕수궁의 역사 (중명전 전시물)

1905년 12월 16일에 을사오적 즉 학부대신 이완용,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군부 대신 이근택이 장문의 변명 상소를 올렸다.    

상소문을 읽어보자. 

“ 신들이 성조(聖朝)에 죄를 짓고 공손히 천토(天討)를 기다린 날도 여러 날이 되었는데, 신들이 버젓이 의정부에 있는 것은 염치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국(時局)을 보건대 어찌할 수 없어서입니다.”

이들은 조약을 체결하면서 반대 한 번 제대로 안 했으면서, 시국을 보건대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다니 참으로 파렴치하다.

이어서 이완용 등 을사오적은 상소를 올린 민영환, 조병세, 이상설등이 조약의 주지(主旨)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들이 올린 상소는 흐리멍덩하게 하는 말이라고 싸잡아 비판한다. 
그렇다면 민영환, 조병세 등의 순국은 개죽음이었단 말인가?  
   
“새 조약의 주지(主旨)로 말하면, 독립(獨立)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사(宗社)는 안전하고 황실은 존엄한데, 다만 외교에 대한 한 가지 문제만 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으니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면 도로 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나라가 독립 국가이고 황실도 그대로이며, 다만 외교 한 가지 문제만 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는데 호들갑을 떤다는 투이다. 
 
외교권은 잠시 일본에 맡겼으니, 나라가 부강해지면 도로 찾을 날이 있을 것이라는 궤변 일색이다. 외교권이 전당포에 잠깐 잡혔다가 돈 생기면 도로 찾는 물건이란 말인가? 1905년에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은 1907년에 군대 해산, 1909년 사법권 상실, 1910년에는 일제에 강점되었다.  

상소는 이어진다.     

“더구나 이것은 오늘 처음으로 이루어진 조약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지난해(1904년)에 이루어진 의정서와 협정서에 있고 이번 것은 다만 성취된 결과일 뿐입니다. 

가령 국내에 진실로 저 무리들처럼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마땅히 그때에 쟁집(爭執)했어야 했고 쟁집해도 안 되면 들고 일어났어야 했으며, 들고 일어나도 안 되면 죽어버렸어야 했을 것인데 일찍이 이런 의거를 한 자를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중대한 문제가 이미 결판난 오늘날에 와서 어떻게 갑자기 후회하면서 스스로 새 조약을 파기하고 옛날의 권리를 만회하겠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

을사오적은 또 궤변을 늘어놓는다. 을사늑약은 1904년 2월 23일의 한일의정서와 8월의 한일신협약의 연장선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때 쟁집한 사람, 의거한 사람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체결과정을 살펴보면 을사오적의 주장은 최악의 궤변이고, 가짜 뉴스의 극치이다.  

이지용 등은 이용익 등 황제 측근 세력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로비 자금 1만 원(지금으로 환산하면 13억 원 정도)이 필요하다고 일본 측에 요구하여 돈까지 받았다. 
그런데 이용익은 2월 22일에도 외부대신 이지용을 찾아가 만일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면 대역죄인으로 처분받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지용은 후환이 두려워 조인을 거부하고 싶었지만, 그럴 경우 일본 측으로부터 받은 로비 자금이 문제가 될 판이었다. 

이러자 일본은 2월 22일에 이용익을 전격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했고 육군참장 이학균 그리고 육군참령 현상건 등을 연금했다. 

그럼에도 이지용은 2월 23일에 아침 서울 밖으로 도주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미리 안 하야시 공사는 이를 막고 12시에 전문 6조의 ‘한일의정서’ 조인에 성공했다. (서영희 지음, 일제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역사비평사, 2012,p 29-36) 

이처럼 한일의정서 체결과정에서 쟁집(爭執)한 사람이 없었다는 이완용 등의 주장은 명백한 가짜 뉴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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