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과 고종 책임 논쟁 

대한제국의 길 (서울시 정동)
대한제국의 길 (서울시 정동)

  # ‘을사오적’ 논쟁

을사늑약은 ‘을사오적(박제순·이완용·이지용·이근택·권중현)’ 때문에 체결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을사늑약은 ‘을사오적’에게만 전적인 책임이 있는가? 

이완용 등 오적은 1905년 12월 16일의 변명 상소에서 이렇게 해명했다.  

“조약의 이면을 따지지 않고 그날 밤의 사정도 모르면서 대뜸 신등 5인(人)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요, ‘나라를 그르친 역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죄를 정부에 돌린다면 8인에게 모두 책임이 있는 것이지 어찌 꼭 5인만이 그 죄를 져야 한단 말입니까?”  

윤덕한도 저서 『이완용 평전』에서 을사늑약의 책임을 5명에게만 묻는 것은 이성적인 역사 인식의 결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탁지부 대신 민영기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은 사실이나 다른 대신들과 함께 문안 수정에 참여하여 사실상 조약에 동의했다. 법무대신 이하영은 이토에게 ’찬성‘ 판정을 받았고, 친일 주구 노릇을 하였다. 또 궁내부 대신 이재극은 고종과 이토 사이를 오가며 어느 대신 못지않게 조약 체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도외시 한 채 오로지 5적에게만 묻는다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역사 인식이다” (윤덕한 지음, 이완용 평전, 도서출판 길, 2012, p 222-226)  

강동진도 ‘을사 5적’이 아니라 법부대신 이하영과 궁내부 대신 이재극을 포함시켜 ‘을사 7적’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4, p 158)

여기에서 꼭 밝혀야 할 것이 있다. 1910년에 대한제국이 망했을 때 일제는 76인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당연히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이하영 ·이재극 소위 ‘을사 7적’이 포함되었다. 아울러 민영기와 한규설도 포함되었는데, 한규설은 작위를 반납했다.  

# ‘고종 책임’ 논쟁 

을사오적 논쟁과 함께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고종 책임론이다. 고종은 11월 18일 오전 1시 궁내부 대신 이재극으로부터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정부 대신들의 무능과 무기력함을 한탄하면서, 배일주의자 박용화 이근상마저 입궐하지 않는 사실을 개탄했다고 한다. 
(서영희 지음, 일제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2012, p 87)

또한 「대한매일신보」등 여러 신문들도 ‘고종은 끝까지 반대했는데 ’을사 5적‘이 일본에 굴복해 멋대로 조약을 체결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이리하여 ‘고종은 을사조약에 반대했다.’는 신화가 창조되어 그것이 오늘 날까지도 마치 역사적 진실인 양 굳어져 전해 내려오고 있다. (윤덕한 지음, 이완용 평전, P 222-223)

그렇다면 고종은 조약 체결에 전혀 책임이 없는가? 

이에 대하여 윤덕한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을사조약의 최고 책임자가 고종이며 이 조약과 관련해 가장 비난받아 할 당사자가 고종이라는 것은 역사의 기록이 증언하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종이 이토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지 못하고 내각에 책임을 떠넘긴 데 이어 나중에는 ‘협의하여 처리하라’고 지시함으로써 내각 대신들로 하여금 선택의 여지를 없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실 전제군주 국가에서 황제의 명령은 최종적인 것이며, 따라서 황제가 협의해서 처리하라고 지시했는데 대신들이 끝까지 이를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토와 하야시는 고종의 이 지시를 최대의 무기로 삼아 대신들을 내리눌렀던 것이다.(윤덕한 지음, 이완용 평전, p 223-224)

한편 송우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고종 황제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전 회의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보호조약을 강요하는 이토에게 고종은 ‘정부 대신들이 의논하여 조치하라’는 말로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고종은 이토에게 오히려 길을 터준 셈이었다. 

 국제 여론 상 후유증이 클 ‘황제 협박’보다는 ‘대신 협박’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던 이토는 고종의 책임 회피를 반기며, 정부 대신들을 온갖 흉악한 술수를 동원하여 협박했다. 협력에는 상당한 보상이 약속되었고, 협력하지 않은 대신에게는 멸문의 협박까지 있었다.”
(강준만 지음, 한국 근대사 산책 4, 2007, p 153-154 )

이처럼 최종 결정권자인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에 대하여 강력한 거부 의사를 밝히지 않고, 대신들 특히 을사오적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끝으로 윤덕한의 논평을 되새긴다.    

“고종이 반대하고 비준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주장은 ‘애국적’일지 모르지만 진실은 아니다. 그리고 진실이 아닌 것에서 진정한 애국심이 솟을 수는 없다. 나라의 체면을 생각해 무능한 군주를 감싸는 억지 주장을 펴기보다는 통렬하게 책임을 물음으로써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자세가 보다 애국적인 것이 아닐까. (윤덕한 지음, 이완용 평전, p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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