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 이상설과 이위종 

월대가 있는 덕수궁 대한문
월대가 있는 덕수궁 대한문

 1907년 7월 20일에 순종은 헤이그 밀사 이상설, 이위종, 이준 등을 처벌하라고 법부에 조령(詔令)을 내렸다. 8월 8일에 법부대신 조중응이 평리원 재판장의 선고문을 순종에게 보고했다. 

“이상설은 교형(絞刑)에 처하고, 피고 이위종과 피고 이준은 종신징역에 처하려 합니다. 이들은 체포한 다음에 형을 집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자 순종은 윤허하였다.
  
이준은 헤이그에서 순국했으니 이상설과 이위종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이상설(1870∽1917)이다. 그는 1908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가서 1년 남짓 체류하며 외교활동을 계속하다가, 190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0년 6월에 그는 이범윤 · 이남기 등과 함께 연해주와 국내 의병을  포함하는 ‘13도 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다. 7월에는 전 군수 서상진을 조선에 보내어 고종의 아령파천(俄領播遷)을 권하는 소를 올려 망명 정부 수립을 기도하였다.

그런데 1910년 8월에 나라가 망했다. 이상설은 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한인을 규합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여 강제병합 반대 투쟁을 주도하였으나 9월 11일에 성명회 활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이상설은 연해주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다가 1911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그는 1911년 12월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1913년에는 이동휘 등과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 사관을 양성하였다.

그런데 한인사회는 계파 간에 단합이 안 되었다. 1913년에 그는 일제의 밀정으로 몰려 하바롭스크로 추방당하였다. 그는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담은 ‘나라를 잃어 나라를 위해 울고, 집을 잃어 집을 위해 울고, 또 나 자신을 위해 운다(泣國泣家又泣己)’라는 이른바 ‘삼읍시(三泣詩)’를 짓고 하바롭스크로 떠났다. 

이후 이상설은 밀정이라는 오해가 풀려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하여 권업회를 이끌었다. 이어서 그는 이동휘·이동녕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그런데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제와 러시아가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탄압하여 권업회 등 모든 단체가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러자 이상설은 활동무대를 상하이로 옮겼다. 1915년 3월경에 그는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들은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등으로 이들은 국내외를 연결하여 광복군의 무장과 독립전쟁 추진 방략을 협의하였다. 

신한혁명단은 고종을 망명시켜 당수로 추대하고자 외교부장 성낙형을 국내로 들여보냈다. 성낙형은 1915년 7월 26일에 고종에게 이상설의 서찰을 전달했고 알현도 하였다. 그러나 성낙형 등이 일제에 체포되어 고종 망명은 실패하고 말았다. 

1916년부터 이상설은 병석에 누웠다. 결국 그는 1917년 4월 1일 우스리스크 대년병원(大年病院)에서 폐환으로 유언을 남기고 별세했다. 향년 48세였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유고(遺稿)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말라.”

다음은 이위종(1884∽?)이다. 이준의 장례식을 치른 뒤인 1907년 9월 5일에 그는 파리 · 베를린 · 런던 등지를 돌며 구국 연설회를 개최하고 러시아에 돌아왔다. 1908년 3월에 이위종은 연해주의 의병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이범진으로부터 1만 루블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4월경에 그는 최재형의 집에서 조직된 동의회에 참석하여 1만 루블을 기부했다. 안중근 등이 인솔하는 200~300명의 동의회 의병은 7월에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의병은 초기에는 홍의동 전투와 신아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회령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회령 부근 영산(靈山)에서 일본군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후 이위종은 1908년 7월 말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그런데 1911년 1월 26일에 부친 이범진이 자결했다. 이위종은 크게 낙담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이위종은 1916년 5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블라디미르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보가 되어 라쟌주 스코핀시 제81보병연대에 배속되었다. 1917년 5월경에는 서부전선에 배치되어 독일군과 대치하였다. 

그런데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와 독일이 강화조약을 체결하자 전쟁이 종료되었고 그는 귀환했다. 그런데 1918년에 러시아 내전이 일어났다. 이때 이위종은 혁명군인 적군에 가담하여 제15소총연대 기관총 부대의 부대장이 되었다. 

1918년 12월에 그는 러시아 공산당 당원이 되었고, 1923년 1월 3일에는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공민권을 획득하였다. 이름도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이’였다. 그는 1924년 10월 주식회사 “흘레보쁘로둑트”의 치타지국의 부사장이 되었다. 이후 그의 행적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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