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황제 강제 퇴위 (2) 

덕수궁 연혁
덕수궁 연혁

7월 19일 새벽 5시에 고종은 황태자에게 정사를 대리하도록 명했다. 

이러자 황태자는 상소를 올려 대리 청정에 대한 명령을 취소할 것을 아뢰었다. 고종이 사양하지 말라고 하자, 황태자는 재차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고종은 더 이상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비답했다.                                                

고종의 ‘대리 청정’ 조칙이 내려지자 이완용은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의식을 주관하는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스스로 궁내부 대신 임시 서리가 되어 7월 20일에 오전 9시에 경운궁 중화전에서 순종 즉위식을 거행했다. 즉위식은 고종과 순종 황제가 직접 참석하지 않고 궁궐의 내시가 대신하는 권정례(權停例)로 조촐하게 치러졌다. 

고종 황제(1852∽1919 재위 1863-1907)는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지 44년 만에 파란만장한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갔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1874∽1926)이 즉위했다. (1907년 7월 19일의 순종실록에는 “명을 받들어 대리청정(代理聽政)하였다. 선위(禪位)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순종이 즉위식을 올리는 그 시각에 이완용의 집이 불탔다. 반일 단체 동우회 회원들이 이완용의 남대문 앞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집을 홀랑 태워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가재도구는 물론 누대에 걸친 조상 신주까지 불 속에서 사라졌다. 이완용 탓에 우봉이씨 조상들의 위패가 수난을 당한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 때는 박제순이 가장 욕을 많이 먹었다. 그런데 2년 후인 고종 퇴위를 계기로 이완용이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어 민중들의 저주를 받았다. 이완용의 가족들은 ‘매국노의 가족들을 잡아 죽이자.’는 군중들의 함성에 쫓겨 남산 아래 왜성구락부로 몸을 피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이완용은 순종의 즉위식을 주관했다. 즉위식이 끝나자 이토는 서둘러 이완용을 태우고 통감 관저로 향했다.  

오고 갈데없는 이완용 가족들은 이날부터 왜성 구락부에 머물렀고, 두 달 후인 9월에 형 이윤용의 집에 들어가 함께 살았다. 

그런데 1908년 1월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이 ‘집도 없이 형에게 얹어 사는 이완용의 딱한 사정’을 듣고 중구 저동에 있는 남녕위 궁을 하사함으로써 이완용은 비로소 집을 장만하게 되었다. 

고종은 퇴위를 강요한 이완용을 괘씸하게 생각할 만도 한데 그에게 집까지 하사한 것이다. 이런 고종의 속내는 정말 일 수 없다. 오죽하면 암군(暗君)이란 칭호가 붙었을까? 윤덕한은 『이완용 평전』에서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황실과 이완용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평했다. (윤덕한 지음, 이완용 평전, p 245-247) 

한편 일제는 서둘러 일본국 천황의 축하 전보를 보내 고종의 퇴위를 기정 사실화했고, 7월 20일에 순종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각국 영사를 수옥헌(漱玉軒 지금의 중명전)에서 접견하였다. 

그런데 고종의 퇴위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 시내 여기저기서 시민들의 통곡이 이어지고 수천 명이 모여 일본인들을 공격하는 폭동 사태가 연출되었다.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보사>가 습격당하고, 시위군중 일부는 경운궁 대한문 앞 십자로에 수백 명이 꿇어앉아 고종에게 결코 양위하지 말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일제는 이런 군중 시위를 경찰과 주차군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처럼 막강한 물리력을 동원한 일제의 제압으로 고종 퇴위 반대 시위는 점차 수그러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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