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한과  표연말의 공초

함양군 남계서원 (정여창을 모신 서원)
함양군 남계서원 (정여창을 모신 서원)

1498년 7월 19일에 실록청에서 아뢰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5번째 기사)  

"홍한의 사초(史草)에는, ‘세조께서 화가(化家, 화가위국 化家爲國의 준말)를 꾀하고자 하여 음으로 무사(武士)와 결탁했다.’ 하였고, 신종호의 사초에는 ‘노산(魯山 단종)의 난(亂)에 정창손이 맨 먼저 계창하여 벨 것을 청했으니, 노산이 비록 세조에게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정창손이 몸소 섬기었는데, 차마 제창하여 베자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표연말의 사초에는 ‘소릉(昭陵 단종의 생모인 문종 비의 능)을 헌 일들은 문종에게 저버림이 많았다.’ 하였습니다."

이에 홍한이 공초하였다.

"신이 한림(翰林)이 되어 국조의 《실록》을 보니 이르되, ‘세조 대왕이 난리를 평정하기 위해 바야흐로 선비를 구하자, 권람이 한명회를 추천하니, 한명회는 심복(心腹)과 이목(耳目)이 되어 많은 무사를 천거하여 마침내 큰 공을 이루었다 하였기에 한명회의 죽음을 기록함에 있어 그 출처와 시말을 자상히 하고자 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고, 화가(化家)를 꾀하고자 했다는 것은 옛글에, ‘집을 일으켜 나라를 세운다.(化家爲國)’는 말이 있기 때문이었고, 음(陰)으로 무사와 결탁했다는 것은, 그 때에 권간(權奸)들이 용사(用事)하여 흉화(兇禍)가 불측하므로 감히 드러나게 일을 도모할 수 없었고 명회도 역시 음으로 무사를 천거했기 때문입니다.“

화가위국(化家爲國)은 주로 개국 시조에게 사용한 말인데, 세조는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의미로 화가(化家)를 사용했다. 세조실록 1455년 (세조 1년) 8월 13일 자에 나온다.   

“어필(御筆)로 하교(下敎)하였다.  

"내가 부덕(不德)한 사람으로 참람하게도 대업(大業)을 이어받아 주야로 두려워하며, 상왕(上王)의 중하신 부탁에 부응(副應)할 것을 생각하니, 이는 나의 고굉 제신(股肱諸臣 수족 같은 여러 신하)이 미치지 않는 점을 보익(補益)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생각건대 나의 고굉 제신들이 보좌하고 방위하여 같이 어려운 공을 거둔 것을 어찌 잊겠는가? 지난번에 국가의 비운을 당하여 종사(宗社)가 거의 부진(不振)할 뻔했던 것을 내가 다행히 하늘의 힘을 입어 나라의 큰 난(亂)을 진정시키고 맑고 평화로운 세상을 이룩하였더니, 상왕(上王 단종을 말함)께서 내가 자그마한 공이 있다고 하여 정사(政事)의 보필을 위탁하시고 장상(將相 : 장수와 정승)을 겸임케 하셨던 것이다.

공이 높고 권세가 중하면 세상 사람들이 시기하는 바가 되어 간신의 잔당(殘黨)이 은밀히 보복할 계략을 품어 그 화가 장차 예측하지 못할 것이었으나, 계양군(桂陽君) 이증 · 영천 위(鈴川尉) 윤사로 · 신숙주·권람·한명회 및 정부·육조의 당시 동료들이 함께 서로 보좌하여서 나에게 흉당(凶黨)의 제거를 권고하여 드디어 죄인들이 법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종사의 안위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화가위국하여 오늘이 있게 된 것이 누구의 힘이었던가? 예로부터 천명(天命)을 받은 군주는 실로 인력의 소치가 아니고 먼 옛날부터 그 몸과 하늘의 뜻이 부합하여 미리 정해진 것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업을 놓고 고찰한다면 어찌 유독 하늘의 힘뿐이겠는가? 그 깊은 공을 생각하건대, 진정 잊지 못하겠노라. 바라건대 정부에서는 속히 책훈(策勳)의 은전을 거행하여 동주공제(同舟共濟 환란을 같이 함) 한 뜻을 표하라."

홍한(1451~1498)은 1485년에 별시 문과에 급제, 1490년 지평을 거쳐 1493년 헌납이 되었다. 1495년(연산군 1)에 응교가 되고, 부제학을 역임한 뒤 1498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윽고 표연말이 공초하였다.  

"세조 대왕께서 운을 타고 흥기하셨고 문종은 이미 승하하셨으니, 소릉을 반드시 헐지 않아도 되는데 세조께서 헐어버렸기 때문에 문종에게 저버림이 있다 할 것입니다. 세조조(世祖朝)의 일을 《성종실록》에 쓴 것은, 이미 정미수(鄭眉壽 문종의 딸이자 단종의 누나인 경혜공주의 아들)를 수용(收用)한 것을 썼기 때문에 그 사유를 자상히 밝히고자 그런 것입니다.”

『성종실록』 편수관(編修官)인 표연말(1449~1498)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김굉필·정여창 등과 함께 문장에 뛰어났다. 같은 문하의 조위·김일손 등과도 깊은 교유관계를 가졌다. 1469년(예종 1)에 사마양시에 합격했고, 1472년(성종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고, 1485년 사의(司議)로서 『동국통감』 찬수에 참여하였다. 1490년에는 이조참의·대사성이 되고, 1492년에는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저작권자 © 한국농어촌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