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공초와 권오복의 사초   

자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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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년(연산 4년) 7월 17일에 연산군은 이주를 문초할 것을 전교하였다.

"이주도 역시 김종직의 제자다. 그가 간관(諫官)이 되었을 적에 일찍이 ‘성종은 나의 임금이온데 장차 어떻게 성종을 지하에서 뵈오리까.’ 하였으니, 그도 아울러 문초하도록 하라."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7일 8번째 기사)

이틀 후인 7월 19일에 추국관이 이주를 심문했다. 
 
"네가 성종을 일러 ‘내 임금이다(吾君)’ 했다는데 지금 임금은 유독 네 임금이 아니란 말이냐?"

이주가 말했다.  

"《맹자》에 ‘내 임금이 놀지를 못하면’이란 글이 있고, 또 ‘내 임금의 아들’이란 말(吾王不豫。又云: 吾君之子)도 있기 때문에, 신도 역시 성종을 ‘내 임금’이라 이른 것이옵니다." 
 
이러자 연산군은 다시 묻게 하였는데, 이주의 대답은 이전과 같았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6번째 기사) 

이주(1468~1504)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1488년(성종 19)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예문관검열을 하고 1495년 8월 9일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그는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 직언을 잘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1495년 11월 23일에 헌납 김일손·정언 한훈과 함께 수륙재 금지를 청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495년 11월 23일)
이어서 윤필상 등이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그윽이 듣자오니 권오복의 사초(史草)도 역시 김일손의 것과 같다 하온데, 어제는 단지 권경유의 사초만을 내렸으니, 신 등은 모르겠습니다만 권오복의 사초를 당초에 보고하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이미 보고했는데도 미처 내려 주지 못하셨습니까?"

이러자 연산군은 명하여 사초(史草) 4폭을 보여 주었는데, 모두가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오로지 권오복의 사초에 이르기를, ‘김종직이 일찍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는데, 간곡하고 측은하고 침착하고 비통하여 남이 말 못하던 데를 말하였으므로 사림 간에서 전해져 외었다. 식자들은 말하기를 ‘제(帝)의 복(服)이 구장(九章)이라 하였는데, 지금 칠장(七章)이라 이른 것은 무슨 까닭이냐? 이는 반드시 뜻이 있어 지은 것이니, 크게 세교(世敎)에 관계되므로 썩지 않게 남겨 둘 만하다.’ 하였고 
‘또 《청구풍아(靑丘風雅)》를 편찬하면서 인물 성씨(姓氏) 아래에 주(註)하기를, 성삼문은 이개 등과 더불어 노산(魯山 단종을 말함)을 복위(復位)시킬 것을 꾀했다.’ 하였고, 또 ‘권람은 세조를 추대했다 하였으니, 직필(直筆)이 늠름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하였다. 

그래서 윤필상 등이 의금부 관원을 보내어 권오복을 잡아오라고 하고 그의 집을 봉쇄할 것을 청하니, 연산군은 이를 허락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7번째 기사)   

권오복(1467∽1498)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김일손과 매우 친한 사이였다. 그는 1486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해 예문관에 들어갔다. 그 뒤 봉교·수찬·교리 등을 역임하고, 1495년 말에 노모 봉양을 위해 향리에서 가까운 함창현감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연산군은 실록청 당상에게 사초를 상고(上考)할 것을 명했다.  

"신하를 믿지 않는 것이 진실로 그른 일이다. 그러나 어진 선비들이 붕당을 하고자 하여 그 사초(史草)를 초할 적에 짐짓 빠진 부분이 있도록 하지 않았겠느냐. 다시 명령하여 수검(搜檢)하는 것이 어떠하냐?"

이러자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실록청 당상으로 하여금 각각 그 방의 사초를 상고하게 하는 것이 편안합니다만, 지금 국문을 받고 집에 있으므로 불가할 듯합니다."

이에 전교하였다.  

"말한 바가 진실로 옳다. 패초(牌招 목패에 신하의 이름을 씀) 해서 다시  고계(考啓)하여 아뢰도록 하라."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8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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