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점필재집』을 간행한 정석견을 파직하다

추원재 (경남 밀양시 김종직 재실)
추원재 (경남 밀양시 김종직 재실)

 <연산군 일기> 1498년 7월 19일 10번째 기사는 계속된다.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정석견의 ‘단지 목록만 보고 그 글을 보지 못했다.’는 그 말도 바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마는, 전라도는 사무가 하도 많으니 진실로 펴 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오며, 또 그가 김종직에게 붙지 않은 내용은 유자광이 잘 알고 있사옵니다.”

정석견(1444∼1500)은 1474년(성종 5)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을 지냈고, 1485년에 이조좌랑에 올랐다. 1493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고, 1495년(연산군 1)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병조참의를 역임했다. 이후 그는 전라도 관찰사를 하다가 1497년 8월 5일에 대사간을 거쳐 9월 13일에 이조참판에 올랐다. 

그런데 정석견은 전라도 관찰사 시절인 1497년에 김종직(1431∽1492)의 시문집인 『점필재집(佔畢齋集)』을 간행하였다. 『점필재집』은 점필재 김종직이 죽은 다음 해인 1493년에 그의 제자이자 처남인 조위에 의하여 편집되었다. 1494년에 원고를 더 모으라는 성종의 명이 있었으나 성종이 붕어하자 문집은 간행되지 못하다가 정석견이 간행하였던 것이다.  

이윽고 유자광이 아뢰었다.  

"신이 듣자 온 즉 경상도 함양 사람들이 김종직의 사당을 세운다 하기에 바로 물어본 결과, 이는 표연말·유호인이 사주한 것이요, 함양 고을 부로(父老)들이 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은 고향이므로 중지시켰더니 나중에 신이 거상[守喪]하느라고 남원 고을에 사는데, 표연말이 승지가 되어 정석견에게 편지를 통해서 신에게 부탁하게 하였습니다.” 

유자광은 1489년(성종 20년) 10월, 유자광은 성종에게 남원에 홀로 사는 어머니 최씨가 팔십 고령이므로 서울로 모셔와 봉양케 해달라고 간청하여 허락받았다. 1490년(성종 21년)에는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 오려 하는데 연로하여 말을 탈 수 없으니 가마꾼을 보내 달라고 간청했다. 이러자 사림에서는 그가 서얼 출신으로 1품에 이르렀지만 어미의 병을 핑계로 1년에 두세 차례 고향을 가는 바람에 현지 수령들이 접대하느라 등골이 휠 정도인데 이제는 가마꾼까지 달라고 주청하니 괘씸하다며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그런데 1495년(연산군 1년)에 유자광의 어머니가 남원에서 별세하자, 유자광은 남원에서 거상하였다.  

유자광의 말은 이어진다. 

“그래서 정석견이 신을 찾아와 표연말의 뜻을 말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그대의 생각에는 사당을 세우는 것이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하였더니, 정석견은 ‘우리 조부가 향곡(鄕谷)에 있어 아이들을 교수하여 근후(謹厚)함으로 소문났는데, 이때에 조정에서 유일(遺逸 학식과 도학이 높은데도 벼슬하지 않고 숨어 사는 선비)을 구하자, 고을 사람들이 내 조부로 명(命)에 응하려 하니, 내 형(兄)은 말리면서 말하기를, ‘내 조부의 행적은 이뿐인데 어진 이를 구하는 명령에 응하려고 한다면, 이는 비단 당세(當世)를 속이는 것일 뿐 아니라 또한 후세를 속이는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이 사당을 세우는 것도 역시 후세를 속이는 것이다.’라고 말한즉, 정석견이 김종직의 당(黨)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옵니다."

이러자 연산군이 전교하였다.  

"채수·이창신·김심은 석방하라. 유자광이 비록 정석견이 김종직에게 붙지 않은 사실을 해명했지만 선뜻 석방하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나 뭇사람들의 공론이 석방할 만하다 하니 석방하도록 할 것이나, 다만 문집(文集)을 간행한 잘못만은 율(律)에 비추어 계하도록 하라.”

이에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율(律)에 비추어 정석견이 김종직의 문집을 발간한 죄는 곤장 80대와 고신(告身) 3등을 박탈하는 것에 해당하옵니다.”

이윽고 연산군은 정석견을 파직시키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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