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성중엄을 계속 구금시키다.   

1498년 7월 12일에 의금부 관원 홍사호 등이 김일손의 집에서 수색한 잡문서 중에서 이목(李穆 1471∼1498)이 김일손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이목의 편지를 읽어보자.  

"목(穆)이 실록청(實錄廳)에 출사(出仕)한 것이 이제 수십 일이 되었습니다. 형의 사초(史草)가 마침 동방(同房)인 성중엄의 손에 있었는데, 당상(堂上)이 날마다 쓰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삼아 모두 책에 쓰려고 하지 않는다 하기에, 내가 아침저녁으로 성중엄을 책하니, 성중엄도 사람이 군자(君子)이기 때문에, 마음에 감동되어 오히려 김일손의 사초가 한 자라도 기록되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의 당상(堂上)은 곧 윤효손인데, 윤은 매양 나에게 묻기를, ‘김 아무는 어떠한 사람이냐?’고 했습니다. 윤(尹)이 형의 사초(史草)를 모두 보고나서 하는 말이 ‘나는 김 아무가 이렇게까지 인걸(人傑)인 줄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찬성 이극돈이 윤으로 하여금 숨기게 하였으니, 섶을 안고 불을 끄려고 하는 어리석음과 비슷한 것입니다. 
(중략) 비록 형이 상중에 계신다 할지라도, 원컨대 한 장의 척서(尺書)를 던져서 이 위태한 병을 구해 준다면 거의 사람을 만들 것이니, 오직 이것만 바라는 바이며, 보신 뒤에 불태워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실로 망언인 줄은 알지만 형의 회포를 풀어 드리려는 마음에서 모든 언사를 피하지 않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2일 3번째 기사) 

이러자 연산군은 성중엄을 국문하도록 하였고, 7월 12일에 성중엄이 공초하였다.  

"신이 실록청(實錄廳)의 낭청(郞廳)이 되어 김일손·정여창의 사초(史草)를 보고서 이목(李穆)에게 말하기를 ‘여창의 사초는 기록할 만한 사실이 없고, 일손의 사초는 기록하지 않아야 할 일을 많이 기록했다.’ 하니, 이목은 대답하기를 ‘네가 만약 일손의 사초를 기록하지 않는다면 나는 마땅히 네가 기록하지 아니한 뜻을 쓰겠다.’ 하였습니다. 서로 이야기가 이에 그치고 다시 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2일 10번 째 기사)  

성중엄(1474~ 1504)은 1494년(성종 25)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497년(연산군 3)에 홍문관 저작(著作)으로 승진한 뒤 박사에 이르러 경연사경(經筵司經) 및 춘추관 사관을 겸하여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로부터 7일이 지난 7월 19일에 연산군이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10번째 기사)

“성중엄은 구금 당한 지가 이미 오래이고 또 그가 연루된 것은 이목의 편지 때문이니, 석방을 보류하고 국문하는 것이 어떠하냐?”

이에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성중엄의 범죄에 대한 경중은 현재로 분변되지 못했으니, 선뜻 석방할 수 없사옵니다."

이에 연산군은 ‘알겠다’고 전교했다. 

이어서 연산군은 전교했다. 

"지금 이 옥사(獄事)는 세상에 폭로하기 위한 것인데, 불초한 자가 다시 써 두는 일이 있을까 염려된다.“

이러자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신문이 끝나면 당연히 교서(敎書)를 발포(發布)하여 중외에 유시해야 하고, 그 옥사(獄辭)와 교서는 사관(史官)이 마땅히 모두 써야 하니, 비록 불초한 자가 써 두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후세에 그  누가 믿겠습니까."

이러자 연산군은 "내일 내가 마땅히 다시 말하겠다."고 전교하였다. 
 
이윽고 윤필상 등이 이주를 형장 심문할 것을 청하니, 연산군은 
"이는 반드시 사연이 있을 것이니, 형장 심문하도록 하라."고 전교하였다. 

이주는 형장(刑杖) 30대를 맞고서 공초(供招)하였다.  
"신이 언관(言官)으로서 전하의 의향을 돌리고자 그리하였습니다. 어찌 딴 사정이 있사오리까."

이어서 윤필상 등이 홍한·표연말·최부를 형장 심문할 것을 청하니, 연산군은 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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