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에 대한 평가 

경복궁 사정전
경복궁 사정전

1498년 7월 28일에 연산군은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한치형을 의정부 좌의정으로, 성준을 우의정, 이극균을 좌찬성, 유지를 우찬성으로, 유자광을 숭록 무령군(武靈君)으로, 박건을 좌참찬으로, 노공필을 우참찬으로, 신수근을 이조판서로, 강귀손을 형조판서, 홍흥을 호조 참판, 오순을 공조 참판, 김영정을 대사헌, 박원종을 이조 참의, 성세명을 승정원 도승지로, 정미수를 좌승지로, 홍식을 우승지로, 이세영을 좌부승지로, 권주를 우부승지로, 최한원을 동부승지 등으로 삼았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8일 7번째 기사)

7월 29일에 사헌부가 ‘근일(近日) 간당(奸黨)을 베어 없앤 일에 있어, 윤필상등에게 상을 준 것은 진실로 당연하거니와, 다만 유자광에게는 이미 한 자급을 가했는데 그 아들 유진(柳軫)마저 당상(堂上)으로 승진시키고, 김자원은 내시로서 임금의 명령을 출납하는 것은 바로 그 직분이온데 역시 한 자급을 올린다는 것은 심히 온당치 않다.’고 하며 지평 정인인(鄭麟仁)으로 하여금 아뢰게 하니, 우승지 홍식이 정인인에게 말하였다. 

"지난날 임금께서 어서(御書)를 내려 ‘지금 관은(寬恩)을 베푼 일에 대하여 감히 그르다 하는 자는 법률에 의해 처단하고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임금의 분부가 이러한데도 감히 들어가서 아뢰겠는가." 

이러자 지평 정인인은 두렵고 위축되어 마침내 물러갔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9일 2번째 기사) 

그런데 이 날의 실록에는 ‘유자광에 대한 평가와 무오사화의 전말’이 실려있다. 

“유자광은 부윤(府尹) 유규(柳規)의 서자[孽子]로 날래고 힘이 세었으며 높은 나무를 원숭이와 같이 잘 탔다. 어려서 무뢰자(無賴子)가 되어, 장기와 바둑을 두고 재물을 다투기도 했으며 새벽이나 밤에 떠돌아다니며 길가에서 여자를 만나면 마구 끌어다가 음간(淫姦)을 하므로 유규는 그 소출이 미천한 데다가 또 방종하고 패악함이 이러하니, 여러 번 매질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식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유자광은 처음에 갑사(甲士)에 소속되어 경복궁 건춘문(建春門)에서 파수를 보다가 상소하여 자천(自薦)하니, 세조가 그 사람됨을 장하게 여겨 발탁하여 썼다. 또 무자(戊子)년에 고변(告變)한 공로로써 훈봉(勳封)을 받아 1품(品)의 품계로 건너뛰었다.”

여기에서 무자년의 고변은 예종 즉위년(1468년) 10월 24일에 유자광이 남이(南怡, 1441~1468)의 역모 사실을 고한 일이다. (예종실록 1468년 10월 24일 4번째 기사)

남이는 젊은 나이에 출세하였지만 유자광의 고변으로 처형되었다. 남이는 할아버지가 의산군(宜山君) 남휘이고 할머니는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다. 권람(權擥, 1416~1465)의 사위였다. 남이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고, 1467년(세조 13)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고, 그 전공으로 적개 1등공신과 의산군(宜山君)에 책봉되었다.

이이서 그는 공조판서(세조 13년 12월 17일),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직했으며(세조 14년 7월 17일), 한 달 뒤에는 병조판서에 발탁되었다(세조 14년 8월 23일). 27세에 국방부 장관을 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신임한 세조가 붕어하고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는 비극적 운명을 맞게 되었다.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남이는 병조판서에서 실각하고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임명되었다. (예종 즉위년 9월 7일). 

한 달 뒤인 10월 24일에 병조참지 유자광은 남이가 궁궐에서 숙직하는 중에 혜성이 나타나자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라고 말했다고 고변했다. 

남이는 즉시 체포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모반의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지만 혹독한 국문을 받으면서 결국 시인했고, 사흘 뒤인 10월 27일에 강순 ·조경치 등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조선 후기의 여러 야사는 남이가 유자광의 음모로 죽었다고 보았다. 이런 억울한 사연 때문에 무속에서는 남이를 신령으로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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