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에 대한 평가 (3)

창덕궁 선정전 안내판
창덕궁 선정전 안내판

1476년 2월 23일에 유자광이 한명회의 처벌을 청하는 상소를 다시 올린 날, 사헌부 대사헌 윤계겸이 아뢰었다. (성종실록 1476년 2월 23일 3번째 기사)

"유자광이 상소하여 한명회를 논핵(論劾)하면서 신 등이 극력으로 간(諫)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신 등은 직책에 있기가 편안하지 못합니다." 

이러자 성종은 "여러 말 하지 말라."고 전교(傳敎)하였다. 

대사헌 윤계겸과 대사간 정괄은 이미 1월 14일에 두 번이나 한명회의 아뢴 바를 밝히도록 국문하라고 아뢰었지만, 성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성종실록 1476년 1월 14일 3번째, 8번째 기사)

2월 28일에 좌의정 한명회가 유자광의 탄핵에 대해 변명하고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성종실록 1476년 2월 28일 2번째 기사) 

"신(臣)이 근일에 듣건대, 무령군 유자광은 신이 일찍이 대왕대비에게 아뢰어 전하에게 정사를 돌려주는 일을 정지하도록 청한 것을 가지고, 신의 죄를 만들어 내어 두 번이나 상소하였다고 합니다. 
신은 잠잠히 있을 수가 없어서 감히 변명하게 되었습니다.

유자광이 말하기를, ‘신(臣)이 전하를 노산군(魯山君)에 견주어 도리에 어긋나는 무례한 마음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아뢰기를, ‘노산군이 나이 어리고 고립해 있는데, 부호(扶護)하고 보도(保導)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권세 있는 간신들이 서로 결탁하여 나라의 형세가 거의 위태로워졌는데, 우리 세조대왕께서 이들을 주살(誅殺)하여 제거하고 시국을 진정시켰으니, 다시 안정되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들어와 대통(大統)을 계승하신 날을 당하여, 모든 정사가 다 함께 새로워져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태평의 복을 누리게 된 것은 두 대비께서 보도(輔導)하신 힘인데, 지금 갑자기 겸손해하시면서 정사에 참여하고 결단하는 데에 힘쓰지 않으려고 하시니, 매우 옳지 못한 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지극한 심정이었고 다른 뜻은 없었는데, 유자광이 무슨 말을 가지고 도리에 어긋났다고 하며, 무슨 일을 가지고 예의가 없다고 하는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는 신이 전하를 노산군에 견준 것이 아니라, 바로 유자광이 전하를 노산군에 견준 것입니다. (...) 청컨대 유자광과 더불어 법사(法司)의 뜰 아래에 앉아 한 번 대변(對辨)하게 하소서. 신이 만약 도리에 어긋나고 예의가 없다면 사형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유자광이 말하기를, 신이 권세의 지위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그 권문(權門)에서 나온 사람이 많으며, 또 위세에 겁을 내어 그 죄악을 남김없이 말하는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인재를 천거하여 진용(進用)하는 것은 재상의 일입니다. 신은 비록 공적은 없으나, 쉬지 않고 힘써서 인재를 천거하여 주의(注擬)하도록 했으니, 이는  세조와 예종께서도 아신 바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신이 인재를 임용하는 일을 전하께 건의하였으니 이는 전하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 

(...) 또한 유자광은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모두 신의 문정(門庭)에서 나왔으므로 신의 위세에 겁을 낸다고 하는데, 유자광은 어찌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는 것입니까? 청컨대 대변(對辨)하여서 유자광으로 하여금 일일이 세고 낱낱이 들어 말하기를, ‘아무는 은덕을 입었는데도 말하지 않고, 아무는 두려워서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신은 권력을 남용하고 위세를 떨친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능히 일일이 세고 낱낱이 들어 말하지 못한다면, 유자광은 임금을 속이고 뭇사람을 속이는 죄를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유자광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지록위마 指鹿爲馬)’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유자광이 신을 조고(趙高)에 견주었으니, 이는 전하를 진나라 이세 황제(二世皇帝 진시황 아들)에 견주는 것입니다. 

지금 유자광은 두 번이나 상소하여 죄과(罪過)를 얽어서 만드니, 그 뜻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 늙은 몸을 놓아 보내어 전리(田里)에 돌아가서 여생을 보전하도록 허가해 주신다면, 비록 죽는 날이라도 살아 있는 동안과 같을 것입니다."

글이 올라가니, 성종은 이를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2월 29일에 성종은 좌의정 한명회가 유자광의 상서에 대해 아뢰니 술과 안주로 위로하였다. 

한명회 : 지금 유자광의 비방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대죄(待罪)하겠습니다.
고종 : 좌의정의 마음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유자광의 말이 다만 너무 심한 것뿐이다.

이어서 성종은 한명회에게 술과 안주를 내려 주며 위로하였다. 
(성종실록 1476년 2월 29일 2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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