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에 대한 평가 (4)  

창덕궁 인정전 안내판
창덕궁 인정전 안내판

1476년 3월 1일에 대사헌 윤계겸 등이 상소하여 한명회를 탄핵하였다. 하지만 성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 날 한명회가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윽고 고종은 선정전에 나아가서 유자광을 불러서 한명회의 일을 물었다. 

유자광이 아뢰었다. 

"노산군이 나이 어렸는데도 도와서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다는 등의 말은 대간(臺諫)이 논죄하기를 청할 때에 군기정(軍器正) 이숙감이 신의 집에 와서 한명회에 대하여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신이 듣고서 생각해 보건대, 신하가 아뢰지 않는다면 나라를 근심하는 뜻이 아니기 때문에 감히 아뢴 것입니다."

이에 성종이 말했다. 
"지금 상소를 보니 말한 바의 지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경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유자광 : "신이 얼자(孽子 천첩의 아들)로서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아 지위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입을 다물고 아뢰지 않는다면 성상의 은혜를  보답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직언(直言)한 것입니다. 신 또한 제 말에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종 : "경이 비록 나를 2세(二世: 진시황의 아들 호해 胡亥)에 비견하였지만 조금도 개의하지 않는다. 한명회는 훈구대신인데 경이 조고에 비견하였으니, 조정에서 누가 한명회더러 조고라고 하였는가?"

유자광 : "신이 한명회를 가지고 조고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함이 그와 닮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성종 : "한 번 사책(史冊)에 쓰여지면 만세에 전해져서 고칠 수가 없는 것이다. "

유자광 : " (...) 한명회의 죄는 한 나라의 신민들이 함께 분하고 한스럽게 여기는데, 신이 어찌 말하지 않겠습니까?"

임금 : "내가 경이 일을 말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글의 사연이 사실보다 지나쳤기 때문일 뿐이다. 금후로는 마땅히 조심하도록 하라." (성종실록 1476년 3월 1일 8번째 기사)

3월 2일에 도승지 유지가 유자광의 한명회 탄핵 상소의 잘못됨을 아뢰었다. 이러자 대사간 최한정 등이 올려 유지를 탄핵했으나 성종은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3월 3일에 대사헌 윤계겸 등과 대사간 최한정 등이 함께 한명회·유지의 죄를 논하였으나, 성종은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3월 4일에도 대사헌 윤계겸·대사간 최한정 등이 상소하여 한명회·유지의 죄를 청했으나, 성종은 어서(御書)로 "비록 천번 말하고 만번 말하더라도 나는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3월 6일에도 대간이 합사(合司)하여 뜰에 서서 한명회를 죄주도록 청하니, 저물녘에 이르자 전교하였다. 

“경 등이 여러 번 들어줄 수 없는 일을 청하므로 나도 종일 답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때가 저물어 뜰에 섰으니, 다리가 피곤할 것을 불쌍히 여겨 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 말라.”

3월 7일에 지평 성건이 한명회·유지의 처벌을 아뢰며 도승지 유지와 영의정 정창손, 무송 부원군 윤자운을 소인이라고 말하였다. 
이러자 유지와 정창손· 윤자운이 사임을 청했으나 성종은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대사헌 윤계겸 등과 대사간 최한정 등이 또 다시 상소하여 한명회를 탄핵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좌의정 한명회가 대간의 탄핵에 변명하며 사임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은 상소를 돌려주게 하였다.

"신은 보잘것 없는 몸으로서 대죄(待罪)하고 있는데, 털끝만한 보필도 없이 전하께서 중하게 돌보시고 의지하는 데 힘입어 있습니다. 
(...) 스스로 탄식하기를, ‘저의 나이가 이미 62세이고 병에 걸려 여러 번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고향에서 남은 목숨을 보존하고자 원하오니, 무거운 직임을 풀어 주시어 한가하게 휴식하게 하신다면, 어찌 유자광의 무고(誣告)를 받겠습니까? 

유자광이 지적한 잘못은 신의 죄를 얽어 맞추어 조고·곽광·양기에 비유한 것입니다. (...) 이 세 사람은 그 간악함이 나라를 그르치기에 족하였으며, 그 잔인함이 임금을 시해하기에 족하였습니다. 그런데 유자광이 노신(老臣)을 이에 견주었으니, 신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 원컨대, 전하께서 노신에게 명하여 유자광과 더불어 법사(法司)의 뜰 아래에 앉아서 흑백을 분변(分辨)하되, 유자광의 말이 옳다면 신은 사형의 형벌을 사양하지 않을 것이며, 만약 유자광의 말이 옳지 않다면, 무고로 바로잡아 주신다면 신은 죽더라도 한(恨)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신을 해임하시어 전리(田里)로 돌아가도록 놓아 주소서."

상소가 올라가니 임금이 명하여 돌려주게 하였다.

한명회의 상소에 대한 사신(史臣)이 논평이다. 
"한명회의 실언(失言)이 심하였는데도 상서(上書)하여 스스로 변명하기에 이르니, 시의(時議)가 더욱 그를 그르게 여겼다."
(성종실록 1476년 3월 7일 8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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