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의 전말 (2) 

함양군 학사루
함양군 학사루

1498년 7월 29 일자 『연산군일기』는 계속된다. 

“이 때 이르러 뭇 원망이 서로 뭉칠 뿐 아니라, 연산군 역시 포학하여 학문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더욱 문사(文士)를 미워했다. 연산군은 ‘명예만을 노리고 윗사람을 업신여기며 나를 자유롭게 못하게 하는 것은 모두 이 무리들이다’ 라고 말하여 항상 우울하고 즐거워하지 않아 한 번 본때를 보이려 했지만 미처 손을 쓰지 못했다. 연산군은 마침 유자광의 아뢰는 바를 듣고는 국가에 충성하는 일이라 생각하여 그를 특별히 우대하고 명하여 창덕궁 남빈청(南賓廳 : 창덕궁 내 카페)에서 죄수를 국문하게 했다. 

연산군은 내시 김자원으로 하여금 출납을 맡게 하니, 딴 사람은 참견하지 못하였다. 유자광은 옥사(獄事)를 자임하고 매양 김자원이 교지를 전할 적에 반드시 앞에 나아가 공근한 태도를 극진히 보이고, 그 전교의 사연이 만약 엄하고 심각할 경우에는 스스로 상의 뜻에 맞았다 생각하여 다시 고개 숙이고 엎드려 사례하였다.  

그리고 다 듣고 물러 나와서 흔연히 자부하는 기색이 있어, 마침내는 좌중에다 대고 크게 말하기를, ‘오늘날은 바로 조정을 개혁하는 때이니, 모름지기 대대적으로 처단해야지, 심상하게 다스려서는 아니된다.’고 호언 하였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이 사람들은 도당이 매우 성하여 변을 예측할 수 없으니, 방호를 엄밀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금위병(禁衛兵)을 뽑아서 궁정을 파수하여 출입을 엄금시켰으며, 김일손 등이 국문을 받으러 갈 적에는 군사로 하여금 좌우로 붙잡고 다니게 했으며, 하옥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로 하였다.


유자광은 오히려 옥을 다스리는 일이 점점 해이하여 자기 뜻을 미진할까 걱정하여 단련(鍛鍊)할 방법을 밤낮으로 모의했는데, 하루는 소매 속에서 한 권 책자를 내놓으니 바로 김종직의 문집이었다. 그 문집 가운데서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술주시(述酒詩)」를 지적하여 추관(推官)들에게 두루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다 세조를 지목한 것이다. 김일손의 죄악은 모두가 종직이 가르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고, 즉시 스스로 주석을 만들어 구절마다 풀이를 하여 왕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한 다음, 이어서 아뢰기를, ‘김종직이 우리 세조를 저훼(詆毁)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부도(不道)한 죄는 마땅히 대역(大逆)으로 논해야겠으며, 그가 지은 글도 세상에 유전하는 것이 마땅치 못하오니, 아울러 다 소각해버리소서.’ 하니, 왕이 좇았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은 항우의 숙부인 항량(項梁)이 군사를 일으킬 때에 예전 초나라 임금 회왕(懷王)의 손자 심(心)이라는 아이를 찾아내서 초회왕(楚懷王)이라고 표방하고 여러 반군의 상징으로 모셨다. 그 후일에 항우가 다시 의제(義帝)라고 칭호를 높이고 강서 지방에다가 나라를 정하여 그리로 보내다가 가는 도중에 양자강 위에서 죽여버렸다. 그것은 무죄한 어린 왕족으로서 하나의 비극이어서 후세 사람들이 항상 슬프게 여겼다. 그런데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은 유자광이 의제를 단종(端宗)에 비유하고, 항우를 세조(世祖)에 비유하여 지은 글이라고 해석하여 사건을 키웠고, 김종직은 부관참시 당했다.  

글은 이어진다.

“그래서 김종직의 문집을 수장한 자는 이틀 안에 각기 자진 납상하여 빈청(賓廳) 앞뜰에서 불태우게 하고, 여러 도(道)의 관청에 붙여놓은 현판도 현지에서 철훼하도록 하였다. 성종께서 일찍이 김종직에게 명하여 환취정기(環翠亭記)를 짓게 하고 처마에 걸었었는데, 그것마저 철거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함양(咸陽)의 원한에 대한 보복이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9일 2번째 기사)
김종직은 성종 15년(1484년) 7월에 창경궁 북쪽에 새로 들어선 환취정(環翠亭)의 기문을 지었다.  

김종직은 「환취정기」에서 자연의 춘하추동의 절기와 질서를 인간의 본성인 인의예지와 결부시키고, 임금은 휴식하면서도 백성 생각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사계절의 무늬와 빛깔에 어울리게 퍽이나 아름답고 부드럽게 풀었다. 
 
당시 일화가 전한다. 성종이 기문을 여러 문신에게 맡겼는데 모두 낙제였고, 서거정만 겨우 '삼하(三下)'였다. 그래서 김종직에게 맡긴 것인데 김종직은 한 글자도 수정하지 않고 줄줄 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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