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의 귀재 유자광, 1507년 4월에 탄핵 당하다

연산군 묘 입구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연산군 묘 입구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1498년 무오사화 이후 유자광(柳子光 1436∽1512)은 부귀와 권력을 누렸다. 1504년 갑자사화도 임사홍과 함께 관여하였다.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달했을 때 그는 숨죽였다. 유자광은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 반정 3대장과 밀착했다.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 거사 날, 유자광은 군사를 이끌고 반정에 참여했다. 진성대군(중종)이 궁으로 들어오자 유자광은 재빨리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 한나라 곽광이 창읍왕을 폐한 것처럼 현 임금(연산군)을 폐하여 대궐 안에 가두고 대비께 폐주시킨 이유를 고해야 합니다.”

이게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던 유자광의 놀랍고도 기막힌 변신이었다. 
9월 8일에 유자광은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과 친인척까지도 공신에 포함시켰다. 

그런데 유자광의 종말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무오사화(1498년) · 갑자사화(1504년)를 겪어 침체되었던 사림의 기세가 차츰 회복 되었던 것이다. 사림들은 유자광에 대하여 창끝을 겨누었다.

마침내 중종반정이 일어난 7개월 후인 1507년 4월 13일에 사건이 터졌다. 4월 12일에 유자광은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파직된 고성(固城)·창녕(昌寧) 현감이 일을 잘한다는 고을 백성의 언론을 빌미로 중종에게 대간을 공격했다. 다음날 사헌부 지평 이사균과 사간원 정언 박거린이 유자광을 탄핵했다. 이어서 대간들이 합사(合司)하여 유자광을 탄핵하였다. 

“(...) 유자광은 폐조 말년에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을 보고도 조금도 생각이 없다가, 사기(事機)가 다 정해지게 되자 비로소 온갖 계책으로 따라붙어 외람되게 1등의 공을 차지하였으며, 지금 또 권세를 마음대로 하는 단서를 시험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로를 믿고 임금을 속여 마음대로 방자하게 구는 것이니 그 조짐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국문하여 먼 지방으로 내쳐서 공론을 쾌하게 하소서."
(중종실록 1507년 4월 13일 2번째 기사)

이날 대간이 또 유자광을 탄핵하였다. 

"유자광은 서얼[孽賤] 출신의 흉사(兇邪)하고 부정한 자로서, 제 스스로 세상에 용납되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깊이 공론이 자기를 의논하는 것을 꺼려 바른 사람들 배척하는 마음을 가지니, 사림(士林)에서 뱀이나 물여우[蛇虺短狐]처럼 보아 함께 상종하기를 부끄러하였습니다. 그래서 전후에 마음 터놓고 교제한 자는 오직 임사홍 한 사람뿐이었는데, 다행히도 성묘(成廟)의 밝으신 성감(聖鑑)으로 인하여 그 간악함을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 고성·창녕 현감은 모두 공론으로 아뢰어 파직한 것인데, 유자광이 어진 관리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론을 억제하고 간계를 드러내어 다시 전일 국정을 어지럽히던 술법을 오늘에 시험, 대간으로 하여금 입을 막고 전하의 밝음을 가리게 하는 것이니, 장래의 화가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유자광은 아무런 반성이 없이 공을 믿고 제가 잘난 척하며 조정(朝政)에 간여하려 하니, 먼 지방으로 내쫓기를 청합니다.”

이러자 중종이 전교하였다. 

"근일 우박이 있으므로 구언(求言)을 하였더니, 유자광이 시폐(時弊)를 건의하면서 고성·창녕 수령들에 관한 일을 함께 말한 것이니 무슨 다른 생각이 있겠는가? 성종조에도 귀양보냈다가 곧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것은 공신을 중히 여기는 때문이었다. 허락하지 않는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13일 5번째 기사)

이러자 유자광이 상차(上箚)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다. 

"신이 오조(五朝 세조에서 중종까지)를 섬겨오는 동안 사람은 미천하오나 지위는 높으니, 귀·눈으로 보고 듣는 것을 즉시 말하여 숨겨둠이 없었습니다. 마침 호조 참판 박영문이 고성(固城)·창녕(昌寧) 수령(守令) 등의 일을 말하는 것을 듣고 생각대로 아뢴 것인데, 뜻밖에도 대간이 신을 논박하니 지금 뉘우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대간은 옳다 하고 재상은 그르다 한다.’ 하였습니다. (...) 대간과 재상이 서로 시비하다가 끝내는 바른 공론으로 돌아가는 것이 재상과 대간의 직책입니다. 재상과 대간이 서로 시비하지 못하여 일체가 되지 못하고 피차의 구별이 있어서 서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그 정리를 다하지 못한다면 조정의 복이 아닐 듯합니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13일 6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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