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유자광을 계속 감싸다

창덕궁 희정당
창덕궁 희정당

1507년 4월 16일에 중종은 유자광(1436∽1512)을 파직하였다. 하지만 대간들은 이에 머물지 않고 유자광을 극형에 처하라고 아뢰었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16일 4번째, 7번째 기사)

4월 17일에도 대간이 합사(合司)하여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었다.  

"유자광은 이미 파직하였지만, 그 몸뚱이가 그대로 있으며 시기를 틈타 나라를 그르칠 염려가 없지 않으니 극형에 처하소서. 그 아들 유진은 장순손의 첩을 빼앗고, 유방은 탐오(貪汚)한 짓을 행하였는데, 모두 노간(老奸)한 아비의 기세를 빙자하여 교만하니 먼 곳으로 귀양 보내기 바랍니다. 그 사위 손동과 손자 유승건은 훈적(勳籍)에 참여하기는 하였지만, 모두 제 공이 아니고 유자광의 협잡 행위에서 나온 것이니 훈적을 깎고 멀리 내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중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17일 3번째 기사)

홍문관·예문관도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었지만 중종은 불허했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17일 4번째 기사)

이러자 홍문관이 차자(箚子)를 올렸다.

"옛날부터 제왕이 나라를 다스릴 적에는 반드시 소인을 먼저 제거하였습니다. 유자광은 소인 중에도 심한 자이니, 그 해독이 어찌 사나운 범이나 독한 뱀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 공경 대신이 모두 공론을 옳다 하는데 노간(老奸)을 제압하는 것이 고작 파직에 그치시니 그가 어찌 스스로 반성하겠습니까? 바라건대 공론을 따르시어 분명한 형벌을 써서  후일의 화를 끊으소서." (중종실록 1507년 4월 17일 5번째 기사)

대간들도 차자를 올렸다.   

“(...) 전하께서 온 나라의 공론을 거절하고 노간(老奸)을 용서하심은 무슨 까닭입니까? 신 등은 전하께서도 점점 그의 술수에 말려들까 염려됩니다. 바라건대 속히 유자광의 나라 그르친 죄를 바로잡아 온 나라의 공론을 쾌하게 하소서.”

하지만 중종은 어필로 차자 끝에 쓰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17일 6번째 기사)

4월 18일에도 참찬관 이윤, 장령 한급, 기사관(記事官) 정웅이 유자광을 중형으로 다스리라고 아뢰었다. 

반정공신 영사(領事) 유순정도 ‘유자광의 일은 가볍지 않기 때문에 신등이 파직하기를 청하였는데, 지금 공론은 모두 불가하다 하니 널리 의논하여 조치하라’고 아뢰었다. 

동지사(同知事) 허집, 특진관 이계남은 공론을 따르라고 아뢰었다. 
하지만 중종은 "근일에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모두 ‘파직만 하는 것이 옳다.’ 하였기 때문에 윤허하지 않는다."고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18일 1번째 기사) 

이어서 대간이 합사(合司)하여 상차(上箚)하였다. 

" (...)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한 명 노간(老奸)을 아껴서 하늘이 꾸짖어 경계하는 뜻을 버리십니까? 속히 처치하시어 하늘의 꾸짖음에 답하소서.“

홍문관도 상차하였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천하에 큰 악이 다섯이 있으니, 첫째는 마음씨가 바르지 못하고 음험한 것이고, 둘째는 행실이 괴벽하면서 견고한 것이고, 셋째는 거짓을 하면서도 말이 분명함이고, 넷째는 그른 것을 배워 넓히는 것이고, 다섯째는 그른 일을 감싸주어 번지르르하게 하는 것인데, 이 다섯 가지 중에 하나라도 있으면 처단을 면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유자광을 본다면 음험하고 기회를 노리는 잔꾀가 많으며, 문득 중상모략(中傷謀略)을 가해 선비들을 해쳐 한 그물에 다 잡으려 하니, 이것이 마음씨가 바르지 못하고 험한 것이 아닙니까?
(...) 공로를 논할 때에는 온갖 방법으로 틈을 노려 1등을 차지하고 뻔뻔스럽게 잘난 척하니, 이것이 그른 일을 감싸주어 번지르르하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유자광은 소인 중에도 가장 심한 소인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5악을 잘 살피시어 처벌하소서"

그러나 중종은 어필로 차자 끝에 쓰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18일 2번째 기사)

태학생 윤임 등도 유자광을 탄핵하였다.
  
" (...) 나라 사람들이 모두 ‘나라에 이흉(二兇 임사홍과 유자광)이 있는데, 그 하나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 어찌하여 빨리 제거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한 노간(老奸)을 아끼십니까?"

예문관에서도 상소하여 유자광을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였으나, 중종은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18일 3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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