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들 모두 사직하다

창덕궁 궐내각사 안내판
창덕궁 궐내각사 안내판

1507년 4월 19일에 중종이 조강에 납시었다. 대간이 유자광을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였다. 시강관 경세창이 아뢰었다. 

"유자광의 죄는 종묘사직에 관계되는 것이니 주저할 것이 없습니다."

대간이 또 아뢰었다. 

"어제 경연에서 좌우 대신이 모두 공론을 따르시라고 청하는데, 전하께서는 언제나 대신에게 의논하였다고 핑계하십니다. 지금 대신 및 여러 재상과 대간(臺諫)·홍문관이 모두 죽여야 한다하고, 태학생에서 군졸에 이르기까지도 똑같이 말하니, 이는 국론(國論)이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 이렇게 주저하십니까? 속히 중형에 처하기 바랍니다."

영사(領事) 박건, 지사(知事) 김응기, 특진관(特進官) 이점,특진관 성세순도 유자광을 귀양보내라고 아뢰었다. 

이윽고 중종이 말했다. 

"유자광은 이전에 익대(翊戴)의 공이 있고, 지금 정국(靖國)의 훈(勳)에 참여하였으니, 내가 어찌 참작하지 않고 처치하겠는가?"

이에 시강관 경세창이 아뢰었다. 

"비록 익대의 공이 있었지만, 성종께서 용서하지 않고 멀리 귀양을 보냈습니다. 근자에는 대신을 모해한 일로 하여 공신 정미수·김감을 귀양보냈는데, 어찌 유자광을 용서하겠습니까?"

기사관(記事官) 정웅도 아뢰었다. 

"모든 일을 알지 못하다면 할 수 없지만, 안다면 속히 처단하셔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신진 선비가 어찌 사체를 알겠는가?’ 하십니다. 그러나 신 같은 자는 조석으로 사필(史筆)을 잡고 있으며, 사건을 보면 즉시 기록합니다. 최근엔 신 등이 대간·시종의 상소와 차자를 쓰는데, 유자광이 나라 그르친 정상도 자세히 갖추어 썼습니다. 이미 유자광의 간악함을 쓰고 또 파직을 허락하신 것도 썼습니다. 
  전하께서는 유자광의 간악함을 모른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알고서 용서하여 주시었다 하겠습니까? 만일 알면서도 제거하지 않았다고 기록에 적는다면 성덕에 손상이 될까 두렵습니다. 신 등이 조석으로 시종하면서, 차마 전하께서 후세 사람에게 비웃음을 받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19일 1번째 기사)

이어서 대간·홍문관·예문관·승정원이 유자광을 중형으로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나, 중종은 여전히 윤허하지 않았다.(중종실록 1507년 4월 19일 2번째 기사)

이러자 대간들이 아뢰었다. 

"유자광을 그대로 둔다면 신등은 관을 벗어버리고 멀리 가겠습니다. 속히 결단을 바랍니다."

홍문관도 아뢰었다.
 
"성종조에 대간·시종이 임사홍을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였으나, 성종이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 대간이 힘써 다투지 않았기 때문에 임사홍이 끝내 나라의 우환거리가 되었습니다. 지금 신 등이 만일 여기에 그치고 물러간다면 반드시 후세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속히 결단을 내리소서."

그러나 중종이 따르지 않으므로 대간들이 사직하고 물러갔다. 

조금 뒤에 중종이 대간들을 부르자, 대간들이 임금 앞에 와서 "신 등은 종묘사직의 대계를 하는데, 전하께서 따르지 않으십니다. 언관(言官)이 그 말을 다 하지 못한다면 어찌 감히 업무를 보겠습니까? 아뢴 대로 따르소서." 라고 아뢰었다. 이어서 홍문관도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 날 대사헌 민상안·대사간 윤희손 등도 상소하였다.

" (...) 유자광은 소인중에도 가장 심한 소인입니다. 성종조에 유자광이 임사홍과 결탁하여 조정을 혼란시키자 대간과 대신들이 그를 사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지만 차마 베지 못하고 멀리 귀양보내고 일을 맡기지 않으셨지만 뿌리를 뽑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연산군에 와서 또 임사홍과 함께 연산군에게 아첨하여 끝내는 나라를 그르치기에 이르렀습니다. (...)  

전하께서는 어찌 늙은 간신(老奸 유자광을 말함)의 공로만을 기억하고 조석에 닥쳐올 화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지금 만일 처형하지 않으시다면 그 품은 심술을 부려 사류(士流)를 해치고 국가를 망치게 하리라는 것은 불보듯 명백합니다. 유자광이 죽고 사는 데에 종사의 안위와 신민의 화복이 달렸으니 위태롭고 위태롭습니다.

(...) 신 등은 유자광과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으며, 구구한 충성으로 바라는 것은 유자광을 중형에 처하고 아들·사위·손자도 함께 귀양보내라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역경》의 교훈을 경계삼으시고, 아래로는 임사홍이 나라를 그르친 원인을 징계하시어 사특한 자를 베소서."

하지만 중종은 어필로 소장 끝에 "나의 뜻을 이미 다 말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고 썼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19일 3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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