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간들의  집단 사직이 계속되다

창덕궁 규장각
창덕궁 규장각

1507년 4월 20일에도 대간·홍문관·예문관·승정원이 유자광의 극형을 아뢰었지만 중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날 중종은 대간에게 근무를 명령하였다. 대간들은 중종에게 와서 아뢰었다. 

"신등을 근무하게 하시려면, 신등의 아룀을 받아들이소서.“

그러나 중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20일 1번째 기사)

이윽고 예문관이 유자광의 일을 극론하였는데, 중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홍문관도 아뢰었다.

"옛날부터 군자와 소인이 함께 있으면 소인이 군자를 이기지 못한 적이 없었습니다. 유자광은 나라를 그르치는 노간(老奸)이니, 조정에 있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혼자 결단하실 수 없으시다면 널리 중의를 모으시기 바랍니다."  

중종은 "이미 삼공·육경과 의논하여 처리한 것이다. 지금 중의를 모은들 무엇이 이에 더하겠는가."며 거절했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20일 2번째 기사)

중종은 다시 대간의 근무를 명하였다. 이러자 대간들이 임금 앞에 와서 "옛날부터 종묘사직에 크게 관계되는 일을 의논하다가 임금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나와 일을 보는 일이 없었습니다."라고 아뢰고, 사직하였다.

승정원도 아뢰었다. 

"대간이 사직하니 조정이 안정되지 않습니다. 어찌 한 노간(老奸)을 아껴서 조정으로 하여금 내분이 일어나 소요(騷擾)하도록 하십니까? 지금 홍문관 및 재상 유순정·이계남·이손·허집·박건·김응기·이점·성세순 등이 대간의 공론대로 하기를 청하니, 온 나라의  공론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중종실록 4월 20일 3번째 기사)

4월 21일에도 중종은 대사헌 민상안· 대사간 윤희손 등에게 복직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유자광을 탄핵하니 중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21일 2번째 기사)

이날  사가독서(賜暇讀書)하던 신상 등이 상소하였다.  

"옛날부터 어짐을 알면서도 능히 쓰지 못하고 악을 알면서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은 인군의 큰 우환입니다. (...) 옛날 제나라 위공(威公)이 곽나라에 가서 부로(父老)에게, ‘곽나라가 어찌하여 망하였는가?’고 물으니 부로가, ‘착한 이를 좋아하고 악한 자를 미워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였습니다. 위공은, ‘그렇다면 어진 인군인데 어찌 망하게 되겠는가?’고 다시 물으니, 부로들은 ‘착한 이를 좋아하되 쓰지 못하고, 악한 자를 미워하되 제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망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유자광을 간사하다 여기십니까? 충성스럽다 여기십니까? 그 간악함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밝지 못한 것이며, 간악함을 알면서도 제거하지 못한다면 이는 결단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 이제 공경대부와 대간·시종이 말하고, 태학·유생이 또한 말하며, 거리의 어린 아이들까지도 역시 이를 갈며 통분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 
전하께서만 깨닫지 못하시니 신 등은 전하의 의도가 어디에 계신지를 
모르겠습니다. 이는 필시 간악한 계획이 행하여져서 음으로 결탁하고 
서로 선동하여 흑백을 혼란시키며 천만가지로 시청(視聽)을 그르쳐 전하로 하여금 의심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전하께서 어찌하여 유자광만을 믿고 공경·대간·시종의 말을 불신하십니까? 

(...) 유자광은 근일에 또 글을 올려 ‘무오년의 여당(餘黨)이 아직도 있다.’고 말하니, 이는 무오년 독화(毒禍)의 수법을 다시 전하께 시행하려 하는 것입니다. (...) 전하께서는 어찌 사소한 공로 때문에 종묘사직을 위해 한 늙은 도적을 제거하지 않으십니까? 청컨대 공론을 따르소서"

그러나 중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21일 3번째 기사)

한편 이윤 등이 유자광의 6가지 죄를 아뢰었다.

1. 임사홍과 붕당하여 현석규를 죽이려 함.
2. 한명회는 원훈 대신인데도 작은 죄를 가지고 죽이려 함 
3. 무오년(1498년)에 김일손의 일로 무죄한 사람들까지 모함하여 연산군에게 함부로 죽이도록 부추김
4 혼자 나서서 이세좌와 그 아들 4형제를 죽임
5 승정원에 나가서 윤필상 죽이기를 청하여, 윤필상과 그 아들을 죽임 6. 이극균과 교제한 사람은 모두 귀양 갔는데, 임사홍과 유자광은 이극균과 교제했어도 내간에 아부하여 살아남음
 
하지만 중종은 다 지나간 일이라며 윤허하지 않았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21일 4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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