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유자광을 계속 옹호하다

청계서원 정문 (김일손의 위패를 모신 서원)
청계서원 정문 (김일손의 위패를 모신 서원)

1507년 4월 28일에 중종이 조강에 납시었다. 대간이 유자광의 일을 극론하였으나, 중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어서 대간들은 상차하여 유자광의 공적을 깎고 그 자손들을 멀리 귀양보낼 것을 청했지만 중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28일 2번째 기사)

홍문관도 상차하여 유자광을 극론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28일 3번째 기사)

4월 29일에도 대간과 홍문관은 줄기차게 유자광을 중형에 처할 것을 아뢰었다. 

중종이 조강에 납시었다. 사헌부 지평 이사균이 아뢰었다. 

"유자광의 죄악이 이와 같은데 어찌 익대의 공이 있다 하여 징벌하지 않겠습니까? 신 등이 처형하자고 아뢰지 않고 다만 멀리 귀양보내자고 아뢰는 것은 전하께서 쾌히 받아들이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영사 유순정도 아뢰었다. 

"당초 의논할 때 신 등이 파직을 청하고, 그 후 논의할 때 멀리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습니다. 지금은 여론이 모두 흔쾌하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에 신 등이 공론을 좇으시기를 청한 것입니다. 


유자광은 사람들에게 그의 위엄을 두렵게 하고자 하였고, 그 자손들이 만약 조정에 있으면 비록 큰 화는 일으키지 않을지라도 어두운 밤에 원수를 갚고자 하여 모략 중상을 일삼을 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아뢴 것입니다."

하지만 중종은 따르지 않았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29일 1번째 기사)                               
이윽고 대간이 유자광을 중형에 처할 것을 청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의심하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신 등에게 언책(言責)을 맡겼고, 신 등이 나라를 그르친 유자광의 죄를 가지고 복합하여 논청(論請)한 지 여러 날이지만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맡기고도 의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 등의 말이 믿을 것이 못 된다 하여 공경(의정부 3정승과 대신들)과 의논하였는데, 공경의 말 또한 믿을 것이 못 됩니까? 전하께서 망설이며 결단치 못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 등이 유자광을 주륙하자고 청하는 날, 공경이 다만 파직만 하자고 의논드린 것은 유자광의 죄가 가볍다고 한 것이 아니요, 여러 조정에서 함께 벼슬한 사람을 갑자기 극형에 처하고자 차마 의논드리지 못해서 입니다. 뒤에 다시 공경이 생각해 보니, 나라를 그르친 간신을 하루라도 나라 안에 둘 수 없으므로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한 것입니다.

이래서 성희안이 먼저 아뢰고, 유순·유순정·이계남이 뒤에 아뢰었으며, 김봉·김전·허집·성세순이 이어서 청하였습니다. 성희안·이계남은 판서의 장이며, 유순은 삼공의 우두머리이며, 유순정 또한 우상(右相)이며, 김봉·김전·허집·성세순은 육경의 버금[亞]입니다. 그들의 아룀이 이와 같았다면 여러 대부(大夫)·백집사(百執事)의 뜻을 가히 아실 것인데도 전하께서 오히려 의논하여 죄를 정하였다고 굳게 고집하여 돌이키지 않으시니, 신 등의 의혹이 더욱 심합니다.
(...) 전일 파직하자고 의논드린 것은 유순·성희안·이계남이요, 또 직첩을 거두어 멀리 귀양보내자고 한 것 역시 유순·성희안·이계남입니다. 나라의 삼공원훈(三公元勳)이 시끄럽게 고치는 것을 좋아하여 이처럼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 마땅함을 구하고자 해서입니다. 전하께서 대간의 말을 믿을 것이 못 된다 하시고, 삼공의 의논을 따를 것이 못된다 하시고, 원훈의 아룀을 들을 것이 못 된다 하시어, 한 노간(유자광)을 애석히 여겨 끝내 깊이 다스리지 않으시어 조정과 국인의 공론을 거부하신다면, 그 물론이 어떠하고 그 후환이 어떠하겠으며, 사책(史策)에 실려 천년 뒤에 본다면 전하를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이것이 신 등이 연이어서 번거롭게 소장(疏章)을 올리는 까닭입니다. 청컨대 훈적을 반드시 깎고 유배지를 반드시 고치고 남은 요물들을 반드시 귀양보낸 뒤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대간이 사직하고 복합 상소 하는 것을 시끄럽다고 아니하시고, 조야가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비방하는 의논이 들끊는 것을 시끄럽지 않다고 하면서, 재상의 하루 논의는 시끄럽다고 하십니까?"
(중종실록 1507년 4월 29일 3번째 기사)

이 날 홍문관이 또 상소하여 유자광의 죄를 극론(極論)하니, 상소 끝에 어서(御書)로 적었다. 

"내가 진언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일찍이 조정과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 정하였으니, 죄를 더할 필요가 없다." 
(중종실록 1507년 4월 29일 4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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