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 평해로 유배가다

 

함양군 청계서원 (김일손을 모신 서원)
함양군 청계서원 (김일손을 모신 서원)

1507년(중종 2년) 5월 1일에 중종은 친강(親講)을 하였다. 진사 원윤종 등이 강(講)을 마치자, 대제학 신용개가 아뢰었다. 

"유자광은 누조(累朝 : 세조부터 중종까지 5대의 조정)의 늙은 간신이므로 없애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전하께서도 귀양보낼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죄는 귀양보내는 데 그칠 수 없습니다. 대간(臺諫)이 사직한 지 이미 여러 날입니다. 유자광의 죄가 심한데, 그 이름이 공적(功籍)에 남아 있고 배소(配所)도 또한 고향에서 가까우니, 그를 공적에서 삭제하고 멀리 귀양보내소서."

그러나 중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 유순정이 경연청에서 물러나와 아뢰었다. 

"유자광의 일은 온 나라 공의가 이러한데다 대간이 합사(合司)하여 여러 날을 복합(伏閤)하고 있으므로 조정의 여러 가지 사무를 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외부 사람이 보고 듣기에도 해괴할 것이니, 빨리 결단하여 여망(輿望)을 따르소서."

이러자 중종은 전교하였다. 
"지금 공론이 이러하므로 정부와 육조 판서·한성부 판윤 등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해서 아뢰게 하라."
(중종실록 1507년 5월 1일 2번째 기사) 

이윽고 대사헌 민상안·대사간 윤희손 등이 상소하였다. 

“유자광을 전후의 공신록(功臣錄)에서 삭제할 것과 배소(配所)를 바꾸고 자손도 먼 지방으로 유배 보내는 일들을 오늘 결단하소서” 
(중종실록 1507년 5월 1일 3번째 기사)

이어서 홍문관 직제학 이세인 등이 상차(上箚)하였다.

"신들이 유자광의 일을 가지고 여러 날 논죄(論罪)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으시니, 전하께서는 유자광을 어질다 여기십니까 간사하다 여기십니까? (...) 전하께서 또 하교하시기를, ‘조정에서 이미 의논했다.’ 하시니, 신들이 더욱 의혹됩니다. 죄를 정하던 날 삼공과 육경이 갑자기 수의(收議)하느라 그만 소홀하게 하였다가 공론이 불쾌한 줄 알고서는, 모두 대간의 말을 좇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온 조정이 말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전일에 갑자기 한 의논을 근거로 말하는 자의 입을 막으십니까? 전하께서 쾌히 따르고 머뭇거리지 않으시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중종은 올린 소장(疏章)을 재상에게 보이며 전교하였다.

"유자광에게 논죄된 것이 부족한 것이 아닌데, 그 자손까지 또 먼 지방에 부처한다면 너무 심한 일이다. 이전의 공훈을 삭제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다. 경 등의 뜻은 어떠한가?"

재상들이 의계(議啓)하였다. 

"대간이 자광의 죄를 논하므로 신 등이 처음 파직시켜야 한다고 의계했고, 그 뒤 대간·홍문관·예문관과 태학생까지 격렬하므로 신 등이 다시 멀리 귀양보낼 것을 의계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배소가 고향에서 가깝고 그 자손이 오히려 서울에 남아 있으므로 대간과 시종이 온갖 말로 논계하기를, ‘자광의 전후 공훈을 삭제하고, 그 자손을 먼 지방에 귀양보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신 등이 다시 생각해 보니, 지금 공론을 좇지 않으면 유자광이 다시 음모를 부려 사류(士類)를 일망타진할까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신 등도 대간이 하는 말대로 그 공훈을 삭제하여 멀리 귀양보내고, 아울러 그 자손도 각각 동·서로 보내어 서로 소식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처음에는 익대(翼戴)한 공로는 잊을 수 없다 하였으나, 지금 논하는 자의 말을 들어 보니, 익대한 공도 삭제하는 것이 옳습니다. 쾌히 따르시어 그 조짐을 막으소서."

이러자 중종은 실로 공론이 이러하니 따르겠지만, 재상들이 여러 번 다른 말을 한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했다. 

이러자 재상들은 공론을 따르다 보니 그 말이 세 번 변한 것이니,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다면서, 과단하게 의계(議啓)하지 못하여 지극히 황공하므로 대죄한다 하였다. 

이러자 중종은 "대죄하지 말라."고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1507년 5월 1일 4번째 기사)

이날 중종은 유자광을 평해(平海 경북 울진군)로 귀양보내고 정국공신(靖國功臣)의 호(號)를 삭제하고, 그 자손도 먼 지방으로 유배시킬 것을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史臣曰). 유자광이 무오년의 옥사를 주창하고, 또 갑자년의 화를 일으키어 사대부가 다 죽고 종사(宗社)가 거의 전복될 뻔하였는데도 목숨을 보전하여 천명(天命)대로 살게 되었으니, 비록 적소(謫所 유배지)에서 죽은들 어찌 족히 나라를 그르치는 자의 경계가 되겠는가?
(중종실록 1507년 5월 1일 5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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