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에 유배중인 김준손, 중종 반정을 도모하다

함양군 청계서원
함양군 청계서원

1507년(중종 2년) 6월 2일의 중종실록에는 무오사화 이후 사관이 기록을 소홀히 하게 된 것에 대한 사신(史臣)의 논평이 실려 있다. 

사신은 논한다. 1498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난 이후로 사관의 기록은 왕의 말 출납만을 쓸뿐이었는데, 중종 반정이후에는 사람들이 불붙은 기름 속에서 살아나자 놀고 즐기는 데만 빠져 직무를 돌보지 않고 왕의 말마저도 기록하지 않다가, 여러 해를 지나고 나서야 사고(史稿)를 정리하니, 조정의 논의나 상벌 등의 일에 빠진 것이 많았다.

6월 11일에  시독관(侍讀官) 김준손(金駿孫)이 유자광의 죄를 논하였다. 
(중종실록 1507년 6월 11일 계미 1번째기사)

김준손(1454∼1508)은 김일손의 큰 형이다. 1482년(성종 13년) 10월 24일에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김일손의 둘째 형 김기손이 장원이고 김준손은 2등을 했다. (성종실록 1482년 10월 24일 2번째 기사)

김준손은 홍문관 검토관, 수찬 등을 역임하면서 경연에서 성종과 함께 학문과 정치를 논했으며, 이후 이조 정랑을 거쳐 1493년(성종 24) 함양 군수를 하여 치적을 쌓았다. 

1493년 12월 15일에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이 선정을 베푼 수령을 치계(馳啓)하였다. 

"함안 군수 강백진·금산 군수 이집·함양 군수 김준손·창녕 현감 박한주·의흥현감(義興縣監) 김수문은 청렴하고 신중하게 공무(公務)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성종실록 1493년 12월 15일 2번째 기사)

그런데 김준손은 1498년(연산군 4) 동생 김일손의 사초 문제로 야기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남원에 유배되었다. 

1506년(연산군 12년) 9월 2일에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중종이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연산군을 폐(廢)하여  교동현(喬桐縣 강화도 교동)으로 옮겼다. (연산군일기 1506년 9월 2일 1번째 기사)

이 날의 연산군일기에는 박원종 ·성희안 · 유순정들의 반정 기록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이때 귀양간 유빈·이과·김준손 등은 무리들을 불러 모아 전라도에서 거병하기로 하고, 조숙기 등은 또한 경상도에서 거병하기로 의논하여, 모두 금상을 추대하려 하였다가 상이 이미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곧 중지하였다.”는 기록도 적혀 있다. 

1506년 12월 1일에 좌의정 박원종·우의정 유순정·이조 판서 성희안 등이 유빈·이과·김준손 등의 반정 격문을 사책(史冊)에 적으라고 아뢰었다.

"유빈·이과·김준손 등은 죄를 받고 전라도에 있으면서 국운이 이미 떠나고 민심이 향하는 바를 알고서 주상(主上)을 추대하고자 옥과 현감 김개로 하여금 서울에 격문을 전달하게 하였는데, 미처 이르지 않아서 전하께서 등극한 것을 듣고 돌아갔으니, 마땅히 사책에 크게 적어야 하므로 아룁니다."

그 격서(檄書)는 다음과 같다.

" (전략) 사직이 망하는 것을 앉아서 구경만 하고 견디고 참아 두 성을 섬기겠습니까? 하늘에 있는 성종의 영혼은 응당 구천 지하의 옛 신하들과 이미 몰래 주참한 것을 의논했을 것이고, 또 조정에 있는 공경대부들의 녹봉만을 구차스럽게 탐하고 제 몸만을 오로지 두호해서 옛 임금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음을 원망할 것입니다.

진성(晉城)대군는 성종 대왕의 친아들로서, 어질고 덕이 있으니 어느 분을 우러르겠습니까? 그래서 성종의 옛 신하 모모(某某) 등은 진성을 추대하고자 모월 모일에 의병을 일으켜 제도(諸道)에 격서를 돌리고 날을 약속하여 서울에 모일 것입니다. 

조정에 있는 삼공·육경과 여러 집사(執事)들은 마땅히 속히 추대하여 종사의 위태로움을 붙들고 인신의 분함을 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으면 함께 도모하고 몸을 보호해서 의병이 이르기를 기다리십시오!

태공(太公)이 무왕을 도와 주(紂)를 치자, 앞의 무리가 창을 거꾸로 잡고 뒤를 공격하여 배반했으니, 이때를 당하여는 무왕이 이성(異姓)으로서 혁명하였는데도 인심은 순한 것을 도와서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지금 이 거사는 성종의 친아들을 추대하는 것이라 하늘에 응하고 사람에 따르는 것이니, 누가 감히 이의를 가지겠습니까? (후략) "
(중종실록 1506년 12월 1일 3번째 기사)
 
이윽고 중종은 1507년 6월 23일에 유빈·이과·김준손 세 사람은 원종 공신(原從功臣) 1등에, 김개· 의신정(義新正) 이징원은 원종 공신 2등에 올렸다. (중종실록 1507년 6월 23일 2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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