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오점을 남긴 이극돈

자계서원 전경 (경북 청도군)
자계서원 전경 (경북 청도군)

1508년 1월 15일에 일기청(日記廳:폐위된 임금의 일기를 편찬하는 임시 관청) 당상 성세명 등이 아뢰었다. 

"무오년(1498년) 사국(史局)의 일을 누설한 사람을 유자광에게 물으니, ‘이극돈의 말이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사국(史局)에 관계되므로 처음에는 일기청에 내렸으나, 처벌 문제는 신들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니 조정 대신의 의견을 모아 죄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중종은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1508년 1월 15일 3번째 기사)

1월 17일에 삼공(三公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이극돈에 대한 일로 아뢰었다. 

"이극돈이 죽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그 죄를 추론(追論)할 수는 없습니다." 

이날의 ‘중종실록’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무오년(1498년)의 화(禍)를 발단시켜 갑자년(1504년)에까지 미쳐서 사림(士林)을 살육하여 여지없이 쓸어버렸으니, 이극돈의 죄는 사후(死後)라고 해서 논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중종실록 1508년 1월 17일 3번째 기사)

 

6월 23일에 대간이 이극돈의 일을 아뢰었다.

"지난해에 일기청(日記廳)이 무오년에 사국(史局)의 일을 누설한 자를 아뢰었으므로 장차 죄를 다스리기 위하여 다시 조정 관원을 보내어 당자를 적발하게 하려다가 대신에게 수의하니, ‘여러 번 대사(大赦)를 겪었고, 당자가 이미 죽었다.’ 하여 버려두었습니다. 

사기(史記)는 한때를 직필(直筆)하여 만세에 전하는 것이므로, 만약 누설한다면 사필(史筆)을 잡는 사람이 다 화를 입습니다. 이극돈이 무오의 큰 화를 만들었거니와, 국가가 유자광에게 따진 것은 장차 그 죄를 밝혀 바로 잡으려는 까닭인데, 만약 따지고서 버려둔다면 당초에 따질 것도 없습니다. 또 사사(史事)의 화는 한때에 일어나지 않더라도 후세에 일어납니다. 그 죄를 매우 징벌하여 직필(直筆)의 문을 열게 하소서."

이러자 중종이 전교했다. 

"사사(史事)를 누설하였으니, 참으로 죄가 있다. 그러나 당사자는 죽고 사면을 겪었으므로, 이미 수의(收議)하여 버려두었다."
(중종실록 1508년 6월 23일 4번째 기사)

이극돈은 1503년(연산 9년) 1월 말에 병조 판서를 사직했다. 한 달 후인 2월 27일에 졸(卒)했다. 이 날의 ‘연산군 일기’이다.

“광원군(廣原君) 이극돈이 졸(卒)했다. (...) 둔촌 이집의 증손이며, 우의정 이인손의 아들이다. (...) 이조·호조·병조 3조(曹)의 판서와, 평안도·강원도·전라도·경상도·영안도(永安道) 5도(道)의 관찰사와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다. 

무오년(1498년)의 사화때 파직되었다가, 졸하니 나이가 69세였다. (...) 일찍이 《성종실록》을 수찬(修撰)하면서 김일손이 자기의 악행을 쓴 것을 보고 깊이 원망을 품고 있다가 선왕(先王 세조)의 일에 결부해서 유자광을 사주(使嗾)하여 이를 고발하게 했다. 이로 인하여 사류(士類)를 죽이고 귀양보내기를 매우 혹독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때 사람들이 무오사화에는 이극돈이 수악(首惡)이라고 말했다. (연산군일기 1503년 2월 27일 4번째 기사)

그런데 1504년 5월 10일에 연산군은 이극돈의 공신과 노비·전토를 거두었다.  

“이극돈 같은 자는 무오년의 일이 매우 그르니, 이극돈은 공신 명부에서 삭제하고 노비·전토까지 거두는 것이 가하다."

이윽고 연산군은 10월 22일에 이극돈의 자자 손손(子子孫孫)은 모두 먼 변방으로 축출하여 영영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라고 전교했다. 

한편 1518년(중종 13년) 4월 28일에 조광조가 사습(士習)을 바로잡을 것을 아뢰었다. 이 날의 ‘중종실록’ 끝에는 이극돈에 대한 사평이 실려 있다. 

“또 사신은 논한다. 이극돈이 춘추관 지사(春秋館知事)가 되어 실록을 쓸 때 김일손이 쓴 것을 보고는 바로 유자광에게 일러주었다. 유자광이 그 일을 가지고 죄목을 구성하여 폐주(연산군)에게 올리자, 폐주는 즉시 김일손을 가두고 계속 어진 사대부를 대죄(大罪)에 얽어넣어 매우 많이 주살(誅殺)하였으니, 이는 실로 이극돈이 일으킨 일이다.” (중종실록 1518년 4월 28일 3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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