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 임제의 『원생몽유록』 (3)

나주시 백호임제문학관 입구
나주시 백호임제문학관 입구

임제의 『원생몽유록』은 계속된다. 

네 번째 앉은 사람 이공(李公 이개)이 읊었다. 

이내 몸은 본래부터 높고 큰 담력 가졌으니     微臣自有膽輪囷
어찌 차마 목숨 훔치며 무도한 세상 볼 것인가  那忍偸生見喪淪
죽으면서 남긴 시 한 수는 그 뜻 또한 좋으니   將死一詩言也善
두 마음 가진 사람을 부끄럽게 할 수 있다네    可能慙愧二心人

이개는 군기감(지금의 서울시청 앞) 형장으로 향하면서 시 한 수를 남겼다.  

삶을 우(禹)의 구정(九鼎)처럼 중히 여겨야 할 경우는 삶 또한 중요하지만                                         禹鼎重時生亦大
죽음도 기러기 털처럼 가벼이 보아야 할 경우는 죽음도 영화로세
                                            鴻毛輕處死有榮
두 임을 생각하다가, 문득 성문 밖을 나가노니  明發不寐出門去
현릉(顯陵)의 송백이 꿈속에도 푸르러라.       顯陵松柏夢中靑

이개의 시에서 두 임이 누군가? 바로 문종과 단종이다. 현릉이 어디인가? 현릉은 제5대 임금 문종(1414~1452)의 능이다. 그러면 현릉의 송백 즉 소나무와 잣나무는 무엇을 의미한가? 문종의 고명을 따르고자 단종을 지키려 한 충절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비록 단종을 복위 못 시키고 죽지만, 죽음도 영화(榮華)라고 한 이개의 시는 가슴 저리다.

이윽고 다섯 번째 앉은 사람 류공(柳公 류성원)이 읊었다. 

슬프고 슬프도다 그날의 뜻이 어떠하였던가      哀哀當日志何如
죽으면 그뿐이거늘 사후의 명예를 어찌 논하랴   死已寧論死後譽
천만년에 씻기 어려운 가장 큰 부끄러움이라면   最是千秋難洒恥
집현전에서 일찍이 포상의 조서를 썼던 일일세   集賢曾草賞功書

류성원은 1453년에 집현전에 있으면서 세조의 공을 포상하는 조서(詔書)의 초고를 지었는데 이 일이 그에게는 가장 큰 부끄러움이었다. 

이윽고 복건을 쓴 사람(남효온)이 머리를 긁적이며 갓끈을 씻고 길게 읊었다. 

눈을 들어 보매 산하가 옛날과 다르니         擧目山河異昔時
신정에서 함께 초나라 포로의 슬픔을 일으키네 新亭共作楚囚悲

신정(新亭)은 정자 이름이다. 진(晉)나라가 양자강 이남으로 천도(遷都)했을 때 인사들이 한가한 날이면 신정에 나와서 술을 마셨다. 주의(周顗)가 그 가운데 앉았다가 “풍경은 다르지 않으나 눈을 들어 보매 산하가 다르구나.”라고 탄식하니, 모두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왕도(王導)가 낯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응당 함께 왕실과 협력하여 중원을 회복해야 할 것이지, 어찌 초수처럼 마주 보며 눈물을 흘린단 말인가.” 하였다. 『진서』 ‘왕도열전’에 나온다.

흥망에 마음이 놀라 창자 오히려 찢어지고  心驚興廢腸猶裂
충역에 분함이 사무쳐 눈물 절로 쏟아지네  憤切忠邪涕自垂

밤골 마을의 맑은 바람에 도연명이 늙어가고    栗里淸風元亮老
수양산 찬 달빛에 백이 숙제 굶주리네          首陽寒月伯夷飢
한 편의 청사(靑史)는 후대에 전할 만하니      一編靑史堪傳後
(한 편의 청사는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을 말한다.)
천년토록 응당 선악의 스승이 되리라        千載應爲善惡師

복건을 쓴 사람은 읊기를 마치고 자허(원호)에게 시를 지으라고 권하였다. 자허는 원래 강개한 사람이다. 이에 눈물을 닦으며 슬프게 읊기를,

지난 일을 누구에게 물어볼까      往事憑誰問
황량한 산엔 한 무더기 흙뿐이네   荒山土一丘
한이 깊은 정위(精衛)의 죽음이고  恨深精衛死
혼 끊어지는 두견의 시름이라      魂斷杜鵑愁

정위(精衛)는 염제씨(炎帝氏)의 딸이 동해(東海)에 익사하여 변했다는 새이다. 이 새는 원한이 사무쳐 서산(西山)의 나무와 돌을 물어다가 동해를 메운다고 한다.

두견새는 또 다른 이름이 귀촉도(歸蜀道), 불여귀(不如歸)이다. 신하에게 쫓겨난 촉나라 임금 두우가 슬피 울며 죽어서 새가 되었단다. 그래서 그 새를 ‘촉나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으로 귀촉도(歸蜀道)라 불렀고, ‘돌아가지 못한 혼이’라 하여 불여귀(不如歸)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두견새의 피가 떨어져 두견화(杜鵑花 진달래꽃)가 되었다. 

고국에는 어느 때 돌아가려나     故國何時返
강가 누각에서 이날 놀이하네     江樓此日遊
노래 몇 곡조에 슬픔이 깊은데    悲深歌數闋
지는 달 갈대꽃 핀 가을이로다    殘月荻花秋

자허가 읊기를 그치자, 자리에 가득한 사람이 모두 처연히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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