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동봉육가를 읊다.

김시습 시비 (인제 백담사 내)
김시습 시비 (인제 백담사 내)

 

1485년에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동해 바닷가에 머물렀다. 이즈음에 그는 ‘동봉육가(東峰六歌)’를 지었다. 모순에 찬 자신의 모습을 회고한 자전적 시 ‘육가’는 본래 그가 존경했던 당나라 시인 두보(712∽770)와 송나라의 절의파 문인 문천상(1236∼1282)의 시 형식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면 ‘동봉육가’를 읽어 보자.

1.

나그네여, 동봉이란 이름의 나그네여

헝클어진 흰머리에 초라한 모습

스무살도 못 되어서 글과 칼을 배웠지만

시큼한 선비 꼴은 되고 싶지 않았다네.

有客有客號東峯 유객유객호동봉

鬖䯯白髮多龍鍾 삼발백발다용종

年未弱冠學書劍 년미약관학서검

爲人恥作酸儒容 위인치작산유용

​하루아침에 가업(家業)을 구름인 양 내던지고

물결따라 휩쓸리며 누구를 따라 다녔던가.

아아 첫 번째 노래! 구슬픈 이 노래

검푸른 저 하늘은 도무지 알지 못하네.

一朝家業似雲浮 일조가업사운부

波波挈挈誰與從 피피설설수여종

嗚呼一歌兮歌正悲 오호일가혜가정비

蒼蒼者天多無知 창창자천다무지

2.

​즐율, 가시 많은 즐율나무 지팡이(禪杖)

​이걸 의지해 사방을 유람하였네.

​​북으로는 말갈, 남으로는 부상까지 노닐었다만

어느 곳에 수심 가득한 창자를 붇으랴

楖慄楖慄枝多芒 즐율즐율지다망

扶持跋涉遊四方 부지발섭유사방

北窮韎羯南扶桑 북궁말갈남부상

底處可以埋愁腸 저처가이매수장

해는 저물었건만 내 갈 길은 멀구나

회오리 바람타고 구만리 오르면 좋으련만

​아아 두 번 째 노래! 구성진 이 노래

​북풍이 얼굴을 때리는 처량한 이 신세

日暮途長我行遠 일모도장아행원

安得扶搖摶九萬 안득부요단규만

嗚呼二歌兮歌抑揚 오호이가혜가억양

北風爲我吹凄涼 북풍위아취처량

3.

외조부여, 어린 나를 사랑하신 외조부여

돌 지나며 내가 글 읽는 소리에 기뻐하셨네.

배우는 것 똑똑하자 글과 시를 가르쳐 주시어

일곱 자 글을 지으니 글이 매우 아름다웠네.

外公外公愛我嬰 외공외공애아영

喜我期月吾伊聲 희아기월오이성

學立亭亭誨書詩 학립정정회서시

七字綴文辭甚麗 칠자철문사심려

​영묘(세종)께서 듣고 궁궐로 부르시매

​큰 붓 한번 휘두르면 교룡이 날았었지.

아아 세 번째 노래! 더딘 이 노래

뜻 이루지 못하고 이 몸 세상과 어긋났네.

英廟聞之召丹墀 영묘문지소단지

臣筆一揮龍蛟飛 신필일휘용교비

嗚呼三歌兮歌正遲 오호삼가혜가정지

志願不遂身世違 지원불수신세위

어린 김시습은 외조부에게서 글과 시를 배웠다. 그리고 일곱 자를 연결하여 시구를 짓은 천재로 소문이 났다. 때문에 궁궐에 들어가 세종의 칭찬을 받았다.

(심경호 지음, 김시습 평전, 돌베개, 2021, p 500-506 ; 허경진 옮김, 매월당 김시습 시선, 평민사, 2019, p 91-92 ; 최영자 지음, 꿈꾸고 떠난 사람, 김시습, 빈빈책방, 2020, p 188)

여기에서 율곡 이이가 지은 ‘김시습전(金時習傳)’을 다시 읽어보자.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요,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 일성(日省)이 선사 장씨(仙槎張氏)에게 장가들어 1435년(세종17)에 한성에서 시습을 낳았다. 김시습은 나면서부터 천품이 남달리 특이하여 생후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았다. ... 세 살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다섯 살에 《중용》과 《대학》에 통달하니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 하였다. 명공(名公) 허조(許稠) 등이 많이 찾아와서 보았다.

세종이 듣고 승정원으로 불러 시(詩)로 시험하니 과연 빨리 지으면서도 아름다웠다.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친히 보고 싶으나 세속의 이목을 놀라게 할 듯하니, 그 가정에 권하여 드러내지 말고 잘 가르치도록 하게 하라. 그의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 하고, 비단을 하사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때부터 그의 명성(名聲)이 온 나라에 떨쳐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다만 5세(五歲)라고만 불렀다. 시습은 임금의 권장(勸獎)을 받고 나서는 더욱 원대한 학업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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