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과 남효온의 만남 (2)

부여 무량사 극락전
부여 무량사 극락전

 

남효온은 수락산에 사는 김시습을 자주 찾았다. 남효온이 쓴 시가 있다.

수락산으로 청은(淸隱 김시습의 호)을 찾아가다 길을 잃었다. 30리쯤 갔을 때에 계곡의 근원이 비로소 다하고 길에 드리워진 복숭아 열매가 있었다. 가지를 휘어잡아 열매를 따서 먹으니 주린 배가 불렀다.

1수

온종일 험한 길 걸어 개울 하나 건너니 竟日崎嶇渡一溪

저녁 바람이 기이한 새 울음 불어 보내네 晩風吹進怪禽啼

산길 다한 바위 모퉁이의 복숭아꽃 나무 山窮石角桃花樹

가을 열매 주렁주렁 나그네 향해 드리웠네 秋實離離向客低

2수

맹수들 막 지나가 발자국 마르지 않았는데 虎豹新過跡未乾

구름 깊은 어느 곳이 도인 사는 집이런가 雲深何處道人壇

수목들 하늘에 닿아 길이 없는가 했더니 參天樹木疑無路

고요히 보건대 날다람쥐 바위 사이 숨네 靜看蒼鼯竄石間

(한국고전번역원, 추강집 제3권)

아울러 남효온은 자신이 지은 「사우명행록」에서 김시습에 대하여 이렇게 적었다.

김시습은 본관이 강릉이고 신라의 후예이다. 나보다 나이가 20세 위이다. 자가 열경(悅卿)이고, 호가 동봉(東峰)이며, 또 다른 호는 벽산청은(碧山淸隱)ㆍ청한자(淸寒子)이다. 세종 을묘년(1435)에 태어났고, 5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다. (...) 수락산(水落山) 정사(精舍)에 들어가서 불도를 닦고 몸을 단련하였다. 유생을 보면 말마다 반드시 공맹(孔孟)을 일컬을 뿐 불법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수련하는 것에 대해 물으면 또한 말하려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앉아서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설잠은“괴애는 욕심이 많으니 그럴 리가 없다. 가령 그랬다 하더라도 앉아서 죽는 것은 예절이 아니다. 나는 다만 증자(曾子)가 역책(易簀)하고 죽은 일(증자는 죽음에 임박하여 계손이 준 대부(大夫)의 평상을 까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 하여 바꾸어 깔고 죽었다.)과 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죽은 일(자로가 전사할 때 갓끈이 적의 창에 맞아 끊어졌는데 군자는 죽어도 갓을 벗을 수 없다 하면서 다시 매고 죽었다.)을 들었을 뿐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신축년(1481, 성종12) 연간에 고기를 먹고 머리카락을 길렀다. 글을 지어 조부에게 제사 지냈다.

“삼가 아룁니다. 순(舜) 임금이 오교(五敎)를 펼치면서 부자유친(父子有親)을 첫머리에 두었고, 죄목 3천 가지를 나열함에 불효가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무릇 하늘과 땅 안에 살면서 그 누가 길러 주신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악한 짐승으로는 호랑이와 이리보다 더한 것이 없고 미천한 짐승으로는 승냥이와 수달보다 더한 것이 없지만, 어버이를 사랑하는 성품을 온전히 보존하고 또 근본에 보답하는 정성을 삼갈 수 있으니, 이는 모두 천리가 본래 그러한 것이라서 물욕이 덮어 가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어리석은 소자는 본지(本支)를 계승하였으나 젊은 날 이단에 빠졌기 때문에 통탄스럽게도 미혹되어 보본(報本)을 강구하지 못했고, 장차 불도를 닦으면 선령(先靈)을 천도(薦度)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윤회설처럼 황당한 것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장년에는 그대로 우물쭈물 지내다가 만년이 되어서야 바야흐로 후회했습니다. 이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뒤져서 조상을 추모하는 큰 의식을 고정(考定)하고 청빈한 생계를 참작하여 간소하면서도 정결하기에 힘썼고 제수를 차림에 있어 정성으로 하였습니다.

한나라 무제(武帝)는 나이 70세에 비로소 승상 전천추의 말을 깨달았고, 원나라 덕공(德公)은 나이 100세에 노재(魯齋) 허형의 풍도에 감화되었습니다. 서리와 이슬이 적시는 것을 보고 느끼며 세월이 흘러감을 근심하니 놀랍고 황공함이 그지없고 탄식하고 의아함이 참으로 많습니다. 만약 옛날의 허물을 속죄하여 혹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될 수 있다면, 장차 얼굴을 들고 지하에서 조종(祖宗)을 뵈올 수 있을 듯합니다.”

1482년 이후로는 세상이 쇠퇴하려는 것을 보고 인간의 일은 하지 않고 여염 간에 버려진 사람이 되어 날마다 사람들과 장례원(掌隷院)에서 쟁송(爭訟)하였다. 하루는 술을 먹고 저잣거리를 지나다가 영의정 정창손을 보고 말하기를 “네 놈은 의당 그만두어야 한다.” 하니, 정창손이 못 들은 척하였다. 사람들이 이를 위태롭게 여겨서 일찍이 함께 교유하던 자들이 모두 절교하고 왕래하지 않으니, 홀로 저잣거리의 미치광이 같은 자들과 즐겁게 놀다가 취하여 길가에 쓰러지기도 하였고, 언제나 바보처럼 웃고 다녔다. (후략)

저작권자 © 한국농어촌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