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전문가칼럼
[RBS역사칼럼-길 위의 역사](18회) 단종, 영월 관풍헌에서 죽임을 당하다.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6.07 09:52
  • 댓글 0

[한국농어촌방송=김세곤 칼럼니스트] 1457년 6월 말에 정국은 또 다시 들끓었다. 6월27일에 안동의 관노 이동(李同)이 경상도 순흥에서 유배중인 금성대군(세종의 여섯 째 아들)의 모반을 고변했다. 7월9일에는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한 것이 발각되었다.

이러자 9월10일에 신숙주·정인지 등은 금성대군과 노산군을 사사(賜死 임금이 독약을 내려 자결하게 하는 일)토록 세조에게 청했다.

10월16일에는 종친, 충훈부(忠勳府) · 육조에서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벌을 요청했고, 10월18일에는 양녕대군·효령대군까지 나서서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이어서 10월21일에는 양녕대군과 영의정 정인지가 주동하여 종친과 대신들을 모두 동원시켜 노산군과 금성대군 ·송현수 · 영풍군 등을 사사하기를 청하였다.

이러자 10월21일에 세조는 금성대군을 사사, 송현수를 교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이 날 실록의 말미에는 단종의 죽음에 대해 단 한 줄 기록되어 있다.

“노산군(魯山君)이 이를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세조실록 1457년 10월21일)

그런데 이 기록이 사실일까? 단종이 자살한 것이 맞는가? 세조가 단종의 시신을 예(禮)로서 장사지낸 것일까?

후세 사람들은 단종은 자살 안 했다고 말한다. 중종 때 문신 이자(1480∼1533)는 『음애일기(陰崖日記)』에서 “실록에서 ‘노산군이 금성대군의 실패를 듣고 자진(自盡)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여우나 쥐 같은 무리들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붓장난이다. ‘실록‘을 편수한 자들이 모두 세조를 쫒던 무리들 아닌가?”라고 평했다.

중종 때 문신 호조참의 이맥도 ‘단종은 죽임을 당했다’고 말했다.

“일찍이 듣건대, 노산이 세조께 전위(傳位)하였는데 세조께서 즉위한 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므로, 부득이 군(君)으로 강등하여 봉하였다가 이어 죽임을 내렸다 합니다.” (중종실록 1516년 11월23일)

또한 인조 때 문신 나만갑은 『병자록(丙子錄)』에서 세조실록과 전혀 다르게 적었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지다고 발을 굴렀다. 왕방연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왕방연은 대답을 못하였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단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 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통인이 미처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이날에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한마디로 비운의 왕 단종(端宗 1441∼1457, 재위 1452∼1455)은 1457년 10월24일 영월 관풍헌 앞마당에서 죽임을 당했다.

사진=영월 관풍헌

아울러 세조실록에 “예(禮)로써 장사지냈다”는 것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1498년 7월 무오사화로 능지처사 당한 사관 김일손(1464∼1498)은 사초(史草)에 “노산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연산군일기 1498년 7월13일)”고 직필했다.

그랬다. 단종의 시신은 방치되어 있었는데 고을 향리인 호장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다. 그는 아들 3형제와 함께 미리 준비한 관을 지게에 지고 단종의 시신을 염습하여 영월 엄씨의 선산인 동을지산(冬乙旨山 현재의 장릉)으로 향했다.

주위 사람들이 역적을 비호했다고 화를 입을 것을 염려하여 간곡히 말렸으나,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다가 그 어떤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라고 말하면서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다.

이때는 음력 10월 하순이어서 산에는 이미 함박눈이 쌓였고, 날씨는 추웠다. 엄흥도는 잠깐 쉬려고 하는데, 갑자기 노루 한 마리가 사람들의 인기척에 놀라 달아났다. 노루가 달아난 자리를 보니 눈이 녹아 있었다. 엄흥도는 이곳에 지게를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

조금 있다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깊은 산속으로 가려고 하자 관이 얹혀 있는 지게가 움직이지 않았다.

엄흥도는 ‘이곳이 명당인가 보다’고 생각하면서 노루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에다가 단종의 시신을 몰래 묻고서 종적을 감추었다.

사진=영월 장릉

한편 현종실록 1669년 1월5일자는 단종 죽음에 관한 진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노산군이 살해당한 후 아무도 시신을 거두어 돌보지 않았었는데, 그 고을 아전 엄흥도가 곧바로 가서 곡하고, 관곽을 준비해 염하여 장사를 치렀으니, 지금의 노산군 묘가 바로 그 묘입니다.”

역사기록을 너무 믿지 마라. 가짜도 있다. 조선왕조실록도 때로는 사실(Fact)을 왜곡하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가는 가짜를 거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고 행간도 읽어야 한다. 

김세곤 칼럼니스트  segon53@hanmail.net

<저작권자 © 한국농어촌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세곤 칼럼니스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