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톺아보기 (2) - 명성황후의 국장(國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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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톺아보기 (2) - 명성황후의 국장(國葬)
  • 김세곤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2.03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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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0월 12일에 대한제국 탄생 이후 가장 먼저 치른 국가적 행사는 11월 21일에 있었던 명성황후(1851∽1895) 국장(國葬)이었다. 장례는 왕후가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을미사변 때 경복궁 건천궁에서 시해된 지 2년 1개월 후에 이루어졌다. 장지는 서울 청량리 밖 홍릉이었다.

국장(國葬)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장례비는 쌀로는 44,300여 섬 규모로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110억 원에 달했다.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3, p 106)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고깃값만 해도 6만 냥이 들고 상여꾼에게 호궤한 비용이 6만 2천여 냥, 상여꾼은 7천 명, 등룡(燈籠)은 관례로 준비한 이외에 추가로 1,100쌍을 더 진열하였으며, 다른 비용도 이와 상당하여 다 기록할 수가 없다.”고 적혀 있다.

1888년 3월에 선교의료인으로 조선에 와서 명성황후의 어의였던 언더우드 여사가 1904년에 쓴 『상투쟁이들과의 15년』에도 밤중에 치른 명성황후의 장례식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897년 10월에 임금은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였고 죽은 왕비도 황후로 올려졌다. 이어 11월에는 황후의 장례가 거행되었다. 왕후가 죽은 지 2년이 지난 지금에야 점쟁이들이 자꾸만 방향을 트는 바람에 돈을 무척 들인 뒤에 마침내 묘지가 결정되고 장례 날짜가 잡혔다.

묘지로 정해진 땅은 동대문 밖으로 그 넓이는 몇 에이커나 되었다. 돈을 물쓰듯 했고, 황후의 지체에 어울리고 그에 대한 임금의 애정을 기리는데 필요한 만큼의 위엄과 장중함을 갖추려고 어떤 고통도 감수하고 어떤 비용도 아끼지 않았다. (중략)

조선의 외부(外部)에서는 외국 공사관에 초대장을 보냈다. 우리는 장례식에 참석해달라는 초대장을 받았다.

상여는 21일 아침 8시 정각에 대궐을 떠났다. 군인 5 천명과 등불을 든 사람 4천명, 경찰 650명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무백관이 따랐다. 그 광경은 참으로 굉장하고 다채로운 것이었다. 길거리에는 수 천명이 몰려들었고 길 여기저기에 아치가 세워져 있었다. 옛날 군복과 지금 군복들의 갖가지 모습들, 대신들 시종들 나인들 가마꾼들 마부들의 갖가지 옷차림과 제복들이 곁들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특별 초대를 받은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던 그 벗, 깊은 슬픔을 안겨준 그 벗에게는 찬란한 행렬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저 수수한 문상을 하기로 했다.

오후 8시경에 우리가 장지에 도착했을 때 조선의 고유한 빨간 등불과 노란 등불이 그 넓은 땅을 밝히고 있는 듯이 보였다. 찬란한 만장들이 나부끼고 있었고 들판 여기저기에는 횃불이 피어오르고 있었으며 군인들이 떼지어 그 불 근처에 모여 있었다. 날씨는 몹시 추웠다. 수정처럼 맑은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는 밤이었다.

이 고요하고 성스러운 밤에 장례를 지내는 것은 참으로 어울리는 관습이었다. 그 시간에 신의 존재가 가장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좀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6차례에 걸친 기도와 제사 그리고 마지막 고별 의식을 치른 후에 시신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새벽 3시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

왕족을 나타낼 때 쓰는 노란 비단의 아름다운 어용 가마를 왕실 가마꾼들이 들어 올려 먼저 언덕에 거창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 다음에 푸른 비단으로 된 가마가 따랐고, 마지막으로 황후의 상여가 따랐다.

상여에는 커다란 밧줄을 묶었는데, 그 밧줄을 남자들이 촘촘히 붙어서 잡고 있었다. 그래야만 아주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 말고도 정식 상여꾼이 있었는데, 그 한 사람이 상여 앞에 서서 방향을 잡고 이끌고 있었다. 만사가 아주 꼼꼼하게 진행이 되어서 한 치의 착오가 없었다.

만장과 붉은 등불 노란 등불을 든 군인들과 시종들의 엄숙한 행렬이 상여를 따랐다.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곡을 하면서 행진했다.

상여 뒤로는 황제와 황태자가 따랐다. 그들은 그 소중한 시신이 무덤으로 내려가는 것을 손수 지휘하고 심지어 관이 잘 놓이는지를 보려고 묘실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했다.

다시 제사를 드리고 기도를 드렸다. 나무로 만든 커다란 말을 불태우고 문상객들은 물러갔다. 모든 외교관들과 문상객들이 임금을 뵙고 조의를 표하고 작별 인사를 드림으로써 의식은 아침 8시쯤에 끝났다.” (언더우드 지음·김철 옮김,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이숲,2008, p 228-235)

경기도 여주시 명성황후 생가 (사진=김세곤)
경기도 여주시 명성황후 생가 (사진=김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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