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즉조당과 준명전
덕수궁 즉조당과 준명전

 

1900312일에 의정부 의정(국무총리) 윤용선이 상소를 올렸다. 윤용선은 1899817일에 반포된 <대한국 국제>를 만든 법규교정소 총재였다.

" 첫째, 궁금(宮禁)을 엄숙하게 할 것입니다. 근래에 기강이 무너져 공적인 일을 빙자해서 사적인 것을 도모하여 폐단이 너무 많으므로 매우 통탄스러워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종친과 외척은 모두 촌수(寸數)를 한정하였고, 학식있고 단아한 선비라도 특별히 부르는 일이 없으면 알현할 수 없는 것이 조종조(祖宗朝)의 옛 규례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애당초 자격이 없는 조신(朝臣)들과 사방의 부잡(浮雜)한 무리들이 연줄을 타고 궁궐에 출입하여도 거의 막지 않으니, 기밀이 누설되고 위엄이 농락당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관리와 액속(掖屬)들을 엄히 금하고 살펴서 비록 각부 관리라도 공적인 부름을 받지 않은 경우에는 궁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종친과 외척도 들어오라는 명이 있어야 들이는 옛 법을 거듭 밝히소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의정부가 처리하도록 해주소서.

둘째, 잡세(雜稅)를 없애고 관리를 파견하는 것도 없애소서. 갑오년(1894) 이후 누차 어려운 일을 겪었지만 아직까지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요역(徭役)과 세금을 가볍게 매기어 백성들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근래에 다방면으로 걷어 들이고 명목도 한두 가지가 아니며 사방으로 관리를 파견하여 온갖 침학(侵虐)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속히 칙령을 내리셔서 모두 폐지하게 하소서. 만일 경비가 궁색하여 잡세로 보충하려고 하면 그 권한을 전적으로 탁지부(度支部)에 주어 탁지부가 덜 것은 덜고 징수할 것은 징수하게 하여 그 징수한 재물을 마땅히 써야 될 비용에 이획(移劃)한다면 백성을 착취하거나 중간에서 착복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독쇄관(督刷官), 위원(委員), 파원(派員) 등 허다한 관원은 폐단 위에 폐단만 더하게 되니 모두 없애버려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소서."

(고종실록 1900312)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윤용선의 상소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이때 별입시(別入侍)의 명목이 날로 늘어나 청별입시(廳別入侍), 계별입시(階別入侍), 지별입시(地別入侍) 등이 있었다. 청별입시는 청()에 오르는 자요, 계별입시는 뜨락에 나열해 있는 자, 지별입시란 마당에 서 있는 자이다. 위로는 대관으로부터 아래로는 무당과 백정, 거간꾼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므로 고종은 그들을 다 기억하지 못하고 그들이 알현할 때마다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이에 입시한 사람들은 고종이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기회를 노려 서로 알현하곤 하였다. 어느 곳에는 광산이 난다, 어느 곳에는 수리(水利)가 있다, 어떤 회사를 세워야 한다고 하면 고종은 곧바로 허락했다.

그러나 평안도는 백성들이 사나워 파견된 관원들이 누차 쫓겨나거나 구타를 당하였으므로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오직 영남과 호남지방이 화를 당하여 원성이 날로 드높았다. 이때 윤용선은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억지로 이런 상소를 하였다.”

윤용선이 상소하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궁금이 문란한 것은 과연 한탄스럽다. 무릇 종친과 외척, 조신들의 출입하는 규정은 궁내부로 하여금 옛 법을 거듭 밝혀 시행하게 하라. 독쇄관 같은 관리를 없애버리는 것은 더없이 급한 일이다."

하지만 궁금과 부패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4년 후인 190492일에 의정부 참정(국무총리) 신기선이 상소했다.

첫째, 대궐을 엄숙하고 맑게 하는 것입니다. ... 지금은 하찮고 간사한 무리들이 폐하의 곁에서 가까이 지내는가 하면 점쟁이나 허튼 술법을 하는 무리들이 대궐 안에 가득합니다.

대신은 폐하를 뵈올 길이 없고 하찮은 관리만 늘 폐하를 뵙게 됩니다. 정사를 보는 자리는 체모나 엄할 뿐 서리나 하인들이 직접 폐하의 분부를 듣습니다. 시골의 무뢰배들이 대궐의 섬돌에 꼬리를 물고 드나들며 항간의 무당 할미 따위들이 대궐에 마구 들어갑니다. 평소에 감히 보통 관리도 가까이 하지 못하던 자들이 폐하의 앞을 난잡하게 마구 질러 다닙니다. 이로 인하여 벼슬을 함부로 주고 이를 통해 청탁이 공공연히 벌어집니다. 굿판이 대궐에서 함부로 벌어지고 장수하기를 빌러 명산(名山)으로 가는 무리들이 길을 덮었습니다.

둘째, 뇌물을 없애는 것입니다. ... 지금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뇌물이 아니면 벼슬을 얻을 수 없고 관찰사나 수령 자리에는 모두 높은 값이 매겨져 있고 의관(議官)이나 주사(主事) 자리도 또한 값이 정해져 있으며, 심지어는 뇌물을 바치고 어사가 되어 각도를 시찰하기도 합니다. !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정사가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뇌물처럼 가장 혹독한 것은 없습니다. 대저 뇌물은 무엇에 쓰이는 것입니까? 내탕고(內帑庫)에 보태어 나라의 비용을 넉넉히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까?”(고종실록 1904922번째 기사)

그런데 고종의 비답이 걸작이다.

현재 시행하려면 역시 곤란한 점이 응당 잘 참작해야 할 것이다

무당과 거간꾼들을 엄금하고 뇌물을 근절하는 일을 하는데 무슨 곤란한 점이 있는가? 참으로 이해 안 되는 고종황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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