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참정 신기선의 상소  (4) 

1904년 11월 25일에 신기선은 다시 사직 상소를 올렸다.
  
"신은 재주도 없으면서 외람되게 있지 말아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일을 일답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줄곧 녹봉만 축냈습니다. (...) 많은 재앙이 겹치고 심상치 않은 변고를 당한 때에 크게 개혁하고 크게 분발하지 않고서는 불길에 휩싸이고 물속에 빠진 것을 구출해서 소생시켜 낼 수 없는데, 지극히 어리석고 용렬하여 이미 일을 망쳐놓은 신이 구차하게 벼슬을 하고 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미 지은 죄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간 상사(喪事)를 만나 감히 사임하는 글을 내지 못하다가 오늘에야 겨우 호소하며 폐하를 번거롭게 하니 속히 신의 참정 벼슬과 의정 벼슬을 체차하고 신의 죄를 다스리어 모든 관리들을 각성시키소서."

그러나 고종은 "번거롭게 굴지 말고 즉시 나와 정사를 보라."며 다시 사직을 반려했다. (고종실록 1904년 11월 25일 6번째 기사)

한 달 뒤인 12월 31일에 신기선은 세 번째 사직상소를 올렸다. 

"신이 재주도 없이 외람되게 벼슬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파면시켜 줄 것을 아뢰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그전대로 어물어물 벼슬에 있은 지 이미 한 달이 지났습니다. (...) 만일 편안하고 무사한 때라면 그래도 하는 일이 없이 녹봉이나 축낼 수 있겠지만 오늘날은 절대로 그럴 때가 못 됩니다. 세상에 비상한 변고가 있으면 반드시 비상한 재능을 지닌 인재가 비상하게 일을 처리한 다음에야 비로소 변고에 대처하여 정상으로 돌아설 수 있는 것입니다. (...) 지금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관리들이 사욕만 채웠기 때문에 시행하는 정령(政令)이 부지불식간에 날이 갈수록 압제(壓制)로 줄달음쳤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은 억울한 것이 있어도 풀 수가 없었으며 생각하는 것이 있어도 알릴 수 없었습니다. 생명을 보전할 수 없었고 재산을 보호할 수 없었으나 응당 받아야 할 고통으로 여기고 다시는 벗어날 기대조차 없었습니다.

원한이 극도에 이르렀으나 하소연할 데가 없게 되었고, 그것이 처음 변란인 임술년(1862)의 소요를 초래하였고 두 번째 변란으로 갑오년(1894)의 난리를 초래하였습니다.” 

순종 황제 비 (남양주시 유릉)
순종 황제 비 (남양주시 유릉)

 

조선은 1805년(순조 4년)부터 헌종, 철종까지 안동김씨, 풍양조씨의 60년 세도정치가 이어졌다. 외척들의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했다. 매관매직은 풍습이 되었고, 수령과 아전의 수탈은 일상이었으며, 삼정(三政)의 문란(紊亂)이 극에 달했다. 『매천야록』을 쓴 황현(1855∽1910)은 ‘수령과 아전은 강도와 다름 없었다.’고 개탄했다.
 
1862년에 임술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3개월 사이에 70여개 호남 · 영남등 삼남지역에 퍼졌다. 당황한 안동김씨 정권은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개혁안을 공포했다. 하지만 농민항쟁이 수그러들자 개혁안은 11월에 폐지되었다. 지배층이 이권을 포기할 리 없었다.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1863년 12월에 12세의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대원군이 섭정하였다. 대원군은 안동김씨를 축출하고 양반에게도 군포 징수, 사창제 실시, 서원의 철폐 등 일련의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대원군 경복궁 중건과 쇄국정책 추진, 병인박해는 악수였다. 
 
1873년 11월에 10년 간의 대원군 섭정이 끝나고 고종이 친정하자 이번에는 민왕후(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의 척족들이 판을 쳤다. 다시 외척 정치였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민씨들이 정권을 잡자 백성들이 그 착취를 견디지 못해 자주 탄식하며 도리어 대원군 시절을 그리워했다.”’고 적었다.   

고종과 민왕후는 돈을 물 쓰듯 썼다. 대원군이 십 년간 모은 국고를 일 년 만에 탕진한 것이다. 이때부터 벼슬을 팔고 과거를 파는 나쁜 정치가 잇달아 생겨났다.” (황현 지음, 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p50, 54)
 
1894년 1월 10일 밤에 고부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와 장성 황룡천 전투에서 관군을 대패시키고 4월 27일에 전주성에 입성했다.
 
이에 놀란 고종과 민왕후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특히 민왕후는 흥선대원군이 동학 농민을 배후조종하고 있다는 소문에 신경질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의 악몽 때문이었다. 

“임금과 왕비가 청나라 군대를 불러서 자기 백성을 진압하려 했으니 이게 제정신인가?” (박은식 지음, 한국통사,  범우사, 1999, p 142)

이윽고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놀랍게도 청나라가 패전했다. 청나라는 다시 한번 ‘종이호랑이’임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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