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술에 빠진 고종 

                                                                      중명전
                                                                      중명전

1901년 11월 27일에 고종 황제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서 정환덕이라는 역술가를 만났다. 그는 경상도 영양 사람으로 40세가 되도록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자 어려서부터 공부했던 역술로 출세하고자 서울로 올라왔다. 

정환덕이 역술에 통달한 사람이라고 널리 알려지자 경운궁 전화과장(電話課長) 이재찬이 고종에게 그를 추천했다. 당시 정환덕은 나이가 40밖에 안 되었는데 머리가 백발이었다. 

고종은 첫 질문으로 ‘어쩌다가 40세에 벌써 백발이 됐는지’를 물었다.  이어서 고종은 정말 알고 싶은 것을 질문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500년으로 한정했고 종묘의 정문 이름을 창엽(蒼葉)이라 썼다. 창(蒼)이라는 글자는 이십팔군(二十八君)이 되고 엽(葉)이라는 글자는 이십세(二十世)를 형상한 듯하다. 국가의 꽉 막힌 운수가 과연 이와 같은가?”

고종의 질문은 조선이 망할 것인지를 물은 것이었다. 조선 후기에 ‘조선왕조 500년’이라는 예언이 횡행했다. 그 근거가 종묘 정문 이름인 ‘창엽’이었다. ‘창엽’이란 글자는 ‘조선이 태조 이후 20세대가 되거나 28대째 되는 임금 때에 망한다.’는 의미라는 것이었다.

고종이 정환덕을 만난 1901년은 조선왕조 509년이 되는 때였다. 고종은 26대 임금이었지만 세대로 치면 철종이 20세대였다. 예언대로라면 조선은 철종 때 망했거나, 고종 당대 늦어도 손자 대에서 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자 정환덕은 “폐하의 운수로는 정유년(1897)부터 11년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 운수는 모면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정환덕은 1907년까지는 고종이 황제 자리를 유지할 것이라고 답한 것이다. 

그러자 고종은 “그렇다면 혹 기도한다면 꽉 막힌 운수를 피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고종은 어떻게 해서든 조선왕조를 연장하고 싶었다. 

정환덕은 “인재를 얻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지극히 원론적 답변이었다. 

이틀 후인 11월 29일에 고종은 다시 정환덕을 불렀다. 이날 고종과 정환덕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고종이 다시 왕조의 운명에 대해 물었을 것이고 정환덕은 원론적 대답을 했을 것이다. 이날  정환덕은 “12월 그믐쯤에 화재의 염려가 있습니다”라고 마지막으로 말하고 물러났다.

이날 이후 고종은 더 이상 정환덕을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12월 그믐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러자 고종은 1902년 1월 7일에 정환덕을 함녕전 침실에서 만났다. 두 번밖에 만나지 않은 정환덕을 침실에서 만난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고종이 물었다.

“네가 화재를 미리 알 수 있었던 것은 확정적인 운수가 있어서인가? 아니면 우연히 맞은 것인가? (중략) 장래 종묘사직의 존망을 임금인 나도 알지 못하겠다. 이것을 들을 수 있겠는가?”

정환덕은 참으로 난감했다. 자신이 국가의 존망을 이야기해야 하다니.   
이때 정환덕은 이렇게 말했다 한다. 그의 저술 <남가몽(南柯夢)>에 나온다. 

“신의 계산으로 본다면 다가오는 광무 9년(1905년) 을사 11월 갑자일에 일계(日計)가 건괘(乾卦)의 초구(初九)로 옮겨 들어가게 됩니다. 이는 옛것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로 나가는 시기입니다. 초구는 하루종일 씩씩하고 저녁까지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시국을 당해 국가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위태하고 어렵습니다. 충신과 열사가 서로 죽기를 다투며 조정과 재야가 함께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밖에도 허다한 변란을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궁중의 법을 엄숙히 하시고 용단을 확고히 하시어 어진 신하를 친근히 하시고 소인을 멀리하소서. 그렇게 하면 화란(禍亂)에서 벗어나 복록(福祿)이 되며 꽉 막힌 운수는 가버리고 태평의 운수를 맞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일이 어느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습니다.” 

정환덕의 신기한 역술에 감탄한 고종은 그를 시종원에서 근무하게 했다. 이후 고종은 정환덕이 하는 말은 거의 들어주었다. 문제는 고종은 역술에만 의존한 나머지 개혁을 안 했다는 것이다. 궁중에는 점술가가 득실거리고 부패는 만연했으며, 고종은 측근만 기용하고 간언하는 신하는 멀리했다. 1904년의 안종덕과 신기선의 상소를 읽어보면 망국의 조짐이 그대로 드러난다.  

과연 정환덕의 예언대로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은 껍데기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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