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신에 빠진 고종 

창덕궁 희정당
창덕궁 희정당

1904년 11월 18일에 주한미국공사 알렌은 미 국무부에 아래와 같이 보고했다.  

“고종은 병적으로 미신에 빠져 있으며, 1895년 갑오개혁 기간 중 궁중에서 쫓겨났던 무당들이 궁중의 모든 일에 영향력을 미치고 국고로 들어가야 할 세금까지 가로챘습니다. 고종은 전투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던 1904년 11월에도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는 무당들의 말을 듣고 안심했습니다.”(구대열, 다모클레스의 칼 ? – 러일전쟁에 대한 한국의 인식과 대응, 정성화 외, 러일전쟁과 동북아의 변화, 선인, 2006, p 28) 

1882년 임오군란 때 장호원으로 피신한 민왕후(1851∽1895, 1897년에 명성황후로 추존)는 환궁하면서 여자 무당을 데리고 왔는데, 고종은 그녀에게 진령군이란 군호를 주었다. 측근이 된 진령군은 국정 농단을 하였다. 1893년 8월 21일에 전(前) 정언 안효제가 상소를 올려 무당 진령군을 처벌하라고 탄핵했지만, 탄핵한 안효제가 오히려 귀양을 갔다. 

그런데 고종은 민황후가 1895년에 시해된 지 10년이 다 된 1904년에도  여전히 미신에 빠져 있었다.   

두 사료가 알렌의 보고서를 뒷받침하고 있다. 먼저 1904년 5월 27일의 ‘윤치호 일기’이다. 이 사료는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에 수록되어 있다.   

 

“5월 27일 간밤에 비.

4.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고종 황제는 궁궐을 짓느라 분주하다. (1904년 4월 14일에 경운궁이 모두 불탔다- 필자 주)

무당과 점쟁이들이 있는 방 두 칸에서 시간을 보내는 황제, 난방을 한 곁방 밖으로 나와 한낮의 햇빛을 보거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 하지도 않고 그렇게 할 시간도 없는 황제, 권력이 일상이고 부패가 즐거움이고 음모가 인생인 황제.  이 황제는 이 저주받은 나라의 저주받은 백성들로부터 갈취한 몇백만 원의 돈을 궁궐을 짓는 데 낭비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1904년 9월 2일에 의정부 참정(총리) 신기선이 올린 상소이다.  「고종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현재 온몸과 터럭들까지 다 병들어 단 한 점의 살점도 성한 것이 없이 만신창이가 된 것처럼 온갖 법이 문란해지고 모든 정사가 그르쳐졌습니다. (...) 지금은 하찮고 간사한 무리들이 폐하의 곁에서 가까이 지내는가 하면 점쟁이나 허튼 술법을 하는 무리들이 대궐 안에 가득합니다. 대신은 폐하를 뵈올 길이 없고 하찮은 관리만 늘 폐하를 뵙게 됩니다. 정사를 보는 자리는 체모나 엄할 뿐 서리나 하인들이 직접 폐하의 분부를 듣습니다. 시골의 무뢰배들이 대궐의 섬돌에 꼬리를 물고 드나들며 항간의 무당 할미 따위들이 대궐에 마구 들어갑니다. 

평소에 감히 보통 관리도 가까이하지 못하던 자들이 폐하의 앞을 난잡하게 마구 질러다닙니다. 이로 인하여 벼슬을 함부로 주고 이를 통해 청탁이 공공연히 벌어집니다. 굿판이 대궐에서 함부로 벌어지고 장수하기를 빌러 명산(名山)으로 가는 무리들이 길을 덮었습니다.” 

 

1905년 4월 17일에 의정부 참정대신 민영환이 아뢰었다.
"무당이나 점쟁이 등의 잡술은 나라에서 철저히 금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요즘 법과 기강이 해이되어 그러한 무리들이 서울과 지방에 출몰하면서 요사스러운 말과 술수로 백성들을 선동하며 심지어는 패거리를 지어 정사(政事)를 문란하게 만듭니다. 실로 한탄스러우니, 속히 법부(法部)와 경무청으로 하여금 모두 붙잡아 법에 의거 죄를 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자 고종이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1905년 4월 17일)  

그런데 1주일 뒤인 4월 25일에 무당과 점쟁이 등을 철저히 단속하지 않은 경무사 신태휴가 견책되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고종의 미신 현혹 실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일본인들이 헌병을 파견하여 경운궁의 문을 수비하였다. 이때 요술(妖術)을 가지고 고종을 현혹시키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은 혹 구름을 타고 허공을 날아 순식간에 만리 길을 가서 러시아군과 일본군의 진영(陳營)을 굽어본다고도 하고, 혹은 비와 돌을 마음대로 떨어뜨리게 하여, 만일 적들이 국경을 침범할 때는 비와 돌로 그들을 섬별할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들은 요망스럽고 허황된 것이 모두 이따위 것들이었다. 민영환이 참정이 되어서 누차 그들을 엄히 묻기를 간청하였으나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일본인들이 헌병을 파견하여 금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끝내 금하게 할 수는 없었다.” 

1905년 11월 5일에 전 참찬 곽종석도 미신타파를 상소했다.   

“화려한 옷과 사치스런 노리개, 기이한 물건을 모두 물리치고 비용을 허비하는 여러 토목 공사나 건축 공사를 없애며, 신령과 부처, 무당과 점쟁이를 섬기는 괴상하고 허무맹랑한 짓을 그만두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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