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렌이 본 고종 황제   

                                              구 러시아 공사관 (서울 정동)
                                              구 러시아 공사관 (서울 정동)

주한미국공사 알렌 (1858~1932)은 21년간 한국에서 근무한 한말외교사의 산 증인이자 친한파였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 때 절명 직전의 민영익을 살려내 고종의 어의(御醫)가 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병원인 제중원 초대 원장이 되었다. 

1887년 7월에 그는 주미전권공사 박정양과 함께 미국 워싱턴DC의 한국  공사관에서 일했다. 1890년에 조선에 돌아온 알렌은 미국공사관 서기관, 총영사, 대리 공사 등을 역임하고 1897년 7월에 전권공사가 되었다. 그는 1905년 3월 29일에 해임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1908년에  『조선견문기(Things Korean)』를 발간하였고, 『알렌의 일기』 등을 남겼다.

1903년 6월 1일에 알렌은 새로 개통된 시베리아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돌아본 뒤 영국, 프랑스를 경유하여 미국에 도착했다. 그는   9월 30일에 워싱턴에서 시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했다. 이 면담은 극동에서의 러시아와 일본의 동향에 관한 것이었다. 알렌은 친러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하여 친일론자인 루스벨트 대통령과 격론이 벌어졌다. 

10월에 알렌은 고향 오하이오주 톨레도에 머물렀는데 10월 14일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고종 황제가 허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나를 해치는 일에 동의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황제를 포기한 지 오래다. 황제가 만기친람(萬機親覽)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러시아와 일본 간의 사태에 관해 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흥분이 되는 전쟁 발발뉴스를 듣고 싶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면 전승을 거둔 어느 한쪽이 진정한 한국의 ‘대군주지위(Overlordship)’를 차지해서 ‘허구적인 대한제국(Fiction of Korean Empire)’을 파멸시키고 한국 국민들에게 약간의 자유를 부여할 것이다.”   
(알렌 지음·김원모 옮김,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1, p 288-289)

만기친람은 황제가 모든 일을 다 챙긴다는 부정적 의미가 강한 단어이다. 실제로 대한제국은 황제 1인의 전제국가였다. ‘허구적인 대한제국의 파멸’이란 표현은 더 심각하다.  

알렌은 1903년 10월 20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11월 20일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온 알렌은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견책 처분을 받아 상당히 의기소침했다. 

그런데 1903년 말의 대한제국은 흉흉한 소문에 휩싸였다. 1904년 1월 2일에 고종은 고위 대신을 통하여 미국공사관에 파천을 요청했다. 알렌은 “전쟁이 터지면 황제가 공사관으로 오겠다는 요구를 거절했다.”고 미국 국무부에 보고했다. 

1904년 2월 9일에 일본 해군은 제물포에 정박한 러시아 전함 두 척을 침몰시켰다. 이날 1천 명의 일본군이 서울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도망치고 구중궁궐도 텅 비었으며 조정 대신들도 숨기에 바빴다. 나라가 전쟁터가 되었는데도 국외중립 선언 이상의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고종은 너무 안일했다. 2월 10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하였고, 12일에는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가 서울을 떠났다.  

엎친 데 덮쳐 4월 14일에 경운궁에 큰불이 났다. 이러자 고종은 미국 공사관과 인접한 수옥헌(지금의 중명전)에 임시 거처를 정했다. 


4월에 알렌은 본국에 “고종 황제의 미국에 대한 기대가 당혹스럽다면서 고종이 1882년 한미수호조약 제1조의 ‘거중조항’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905년 들어서 알렌은 한국의 몰락을 예감하고 있었다. 1905년 1월 19일에 알렌은 “황제가 파천을 간청한다는 요청을 대한제국 관료로부터 접수했다.”고 미 국무부에 보고했다. 알렌은 “이런 요구는 다시 듣고 싶지 않다면서 황제가 공사관 담을 넘어오더라도 퇴거를 요구하겠다.”고 보고서에 첨언했다.  

이윽고 알렌은 이렇게 적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이제 그날 이후 차갑고 음울한 침묵의 아침이 되어 버렸다. 백성들은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다. 이들은 지금껏 그래왔듯이 주인이 필요하다. 그런데 황제는 이 나라의 커다란 해충이고 저주이다. 그는 로마를 불태우며 놀아난 네로황제와 다를 바 없이 무희들과 놀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군주이다. 
  한국인에게는 전쟁이 더 나은 조건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탐욕스럽고 비인간적인 관료들을 감시하고 더 많은 자유를 선사할 나라에 흡수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1905년 3월에 알렌이 체임되어 귀국하고 모건이 신임 공사가 되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알렌의 귀국과 관련하여 이렇게 적었다. 
 
“알렌은 우리나라에 10여 년 동안 머물렀는데 귀국에 임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한국 국민이 가련합니다. 내가 일찍이 구만리를 돌아 다녀보고 위아래로 4천 년 역사를 보았지만, 한국 황제와 같은 인간은 또한 처음 보는 인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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