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쓰라-태프트 밀약과 제2차 영일동맹

                          
1905년 1월 1일에 뤼순을 점령한 일본군은 3월에는 봉천을 점령했다.  러시아의 유일한 희망은 발틱 함대였다. 1904년 10월에 발트해를 출발한 발틱 함대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7개월 만에 대한해협에 도착했다. 전투준비를 끝낸 일본연합 함대는 1905년 5월 27-28일에 대한해협에서 발틱 함대를 궤멸시켰다. 이순신을 가장 존경한다는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의 압승이었다. 전 세계는 경악했다. 

하지만 승자인 일본이나 패자인 러시아도 전쟁을 계속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일본은 전쟁을 수행할 능력과 재정이 고갈되었고, 러시아도 1905년 1월 22일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짜르 체제가 위기에 빠졌다. 

이를 알아차린 미국의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재임:1901-1909)이 중재에 나섰다. 러일전쟁 초기에 일본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하버드 대학교 동창생 가네코 겐타로를 미국에 특사로 파견하여 루스벨트를 친일파로 만들었다. 루즈벨트는 가네코가 선물한 '무사도' 영문판 책을 읽고 일본에 푹 빠졌다.          

한편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아시아 순방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다. 7월 5일에 육군장관 태프트를 비롯하여 상원의원

일본의 국권 침탈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일본의 국권 침탈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7명, 하원의원 23명 그리고 21세의 대통령 딸 앨리스와 다수의 군인 및 민간 관계자들은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다. 순방지는 하와이, 일본, 필리핀, 중국, 그리고 대한제국이었다. 

7월 25일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태프트는 7월 27일에 도쿄에서 가쓰라 수상과 밀약을 맺었다. 소위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요지는 미국은 필리핀의 지배를 보장받고 일본은 한국의 지배권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이 밀약은 1924년에야 공개되었으니 고종이 알 리 없었다. 

8월 12일에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체결했다. 1905년 3월 24일에 영국은 일본에 1902년에 체결된 제1차 영일동맹 개정 필요성을 제기했다. 3월 27일에 일본도 찬성했다. 영국은 5월 17일 “현재의 방어동맹을 공수동맹으로 강화하고 동맹의 범위를 인도까지 확장하자.”고 제안했다. 당시는 러시아 발틱 함대가 아시아로 오고 있는 중이어서 영국은 러시아가 인도를 침공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5월 26일에 일본 측 안이 영국에 전달되었다. 여기에는 제1차 동맹의 “청국과 함께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 조항”은 삭제되고 그 대신 “영국은 일본의 한국에서의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의 옹호·증진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관리 감독⋅보호 조치를 취할 권리를 승인한다.”는 조항이 신설되었다. 그런데 당시는 포츠머스 회담이 시작된 직후여서 이 동맹이 회담에 지장을 줄까 두려워 9월 27일에야 발표되었다. (최문형 지음, 러일전쟁과 일본의 한국 병합, P 309-313) 

10월 4일 자 일본 『고쿠민(國民)신문』은 “영일동맹은 사실상 영–미-일 동맹”이라고 보도했다. 

“영국이 우리 동맹이 됐을 때 미국은 그 동맹의 일부가 됐다. 국가적 상황으로 인해 공개적으로 연합을 주장하지 못할 뿐 일본은 공식적인 조약이 없더라도 미국이 우리와 동맹임을 상기해야 한다.” 

그런데 고종은 ‘맏형의 나라’ 미국이 ‘동생의 나라’ 대한제국을 살려 줄  것으로 굳게 믿고 아시아 순방외교사절단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종은 청나라 이홍장이 주선하여 1882년 5월에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거중조정’ 조항에 의거 미국이 ‘중재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고 이에 희망을 걸었다. 참, 순진하다. 아니, 고종은 국제사회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 너무 몰랐다.      

한편 루스벨트 대통령은 러시아와 일본 대표를 미국 뉴햄프셔주에 있는 군항 도시 포츠머스로 불러 회담을 주선했다.

회담에 앞서 일본은 8월 1일에 사할린을 점령했다. 사할린을 일본의 영토로 하려는 의도였다. 8월 9일에 포츠머스 강화 회담이 시작되었다.  
일본 측 대표는 고무라 주타로 외상이었고, 러시아 측 대표는 비테 재무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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