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회 이극돈의 변명 상소   

탁영 연보 (청도 박물관 소장)
탁영 연보 (청도 박물관 소장)

이극돈의 상소는 계속된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2번째 기사)

“이목(李穆 1471∼1498)이 국상(國喪) 초에 으뜸으로 벽불(闢佛)을 제창하여 소(疏)를 올렸는데, 많이 불경(不敬)하므로 전교하여 이르시기를 ‘27일 이후에 마땅히 묻겠다.’ 하셨는데, 마침 그날에 여러 정승과 육조가 다 빈청(賓廳)에 모였습니다.  

 좌중에서 사사로이 하는 말들이 ‘미친 아이의 일이라 족히 헤아릴 것이 못 된다.’ 하므로, 신은 ‘그렇지 않다. 대저 비록 여염의 소민이라도 서로 싸우고 꾸짖을 적에 혹시 말이 그 부모들에게 미치면 반드시 성을 발끈 내어 원망을 가하는 법인데, 하물며 나라 임금의 어머님이시랴? 상소 가운데 두 분 대비를 지적한 말이 극도로 불경스러우니, 주상께서 묻고자 하심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비록 미친 아이일지라도 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었는데 어찌 미친 아이라 하여 그만둘 수 있겠느냐.’라고 말하였습니다.”

여러 정승과 육조 판서들이 이목의 행위를 불문에 처하자고 하는데 유독 이극돈만 이목을 처벌하자고 한 것이다.

“그 후에 신이 정청(政廳)에서 참판·참의 및 도승지 김응기와 더불어 함께 앉아 있었는데, 승정원 서리가 와서 김응기에게 유생(儒生)을 정죄(定罪)했다는 기별을 고해 주므로, 신은 말하기를 ‘이와 같이 정죄한 것은 과한 것이 아니다.’ 하고, 이어 빈청에서 말하던 바로써 말했습니다. 
그 후에 신이 윤효손·성현과 함께 빈전도감(殯殿都監)으로 있었는데, 호조판서 홍귀달이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오늘 정승이 일로 인하여 빈청에 와서 유생의 일을 계청(啓聽)하였으니, 육조에서도 역시 청해야 할 것이다.’하므로, 신은 대답하기를 ‘내 의사는 그렇지 않다. 나는 이미 내 뜻을 빈청에 말하였고 또 정청에도 말했는데, 지금 계청을 한다면, 전일에 내 말을 들은 재상들이 나더러 번복한다 할 것이다. 지금 과거 시험 응시를 정지시키는 벌을 내린다 할지라도 이들은 다 문장에 능한 자라, 만약 시험이 있게 되면 주상께서 반드시 시험에 응할 자격을 허하실 것이요, 만약 허하지 않으실 경우에는 그때 가서 우리들이 청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홍귀달이 다른 육조들과 더불어 계청을 했으나, 윤허를 아니 하시니, 이목 등이 신이 재삼 한 말을 듣고서 극도로 원망하였습니다.” 

성종 임금이 승하하자 연산군은 수륙재를 올렸다. 유생들이 절에서 하는  수륙재를 지내지 말라고 탄원하자 연산군은 수륙재가 끝난 28일 만인 1495년 1월 22일에 생원 조유형 등 157명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 이러자 대신들과 삼사는 하옥을 간곡히 만류하였고, 연산군은 유생 157명의 하옥을 취소했다. 그러나 추국은 계속하라고 전교했다. 이어서 대간들이 유생들을 추국하지 말라고 간언했지만 연산군은 강경했다. 1월 26일에 의금부에서 아뢰었다. 

“정희량은 중형에 처하여 장(杖) 1백 도(度)에 유(流) 3천 리의 형에 처하고, 이목·조유형·임희재·이광좌·안석복·김협 등은 수종(隨從)하였으므로 1등(等)을 감하여 장(杖) 1백, 도(徒) 3년에 처하게 하소서." 
(연산군일기 1495년 1월 26일) 

이에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정희량·이목·이자화는 외방(外方)에 부처(付處)하고, 그 나머지 조유형 등 21인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라."하였다. 

이에 의금부는 1월 27일에 정희량을 해주로, 이목을 공주로, 이자화를 금산으로 귀양 보내고, 생원 조유형 등 21인의 과거 응시를 정지시켰다.  

하지만 1월 27일에 대간과 홍문관이 유생을 죄주는 것이 타당치 못함을 논계하였고, 1월 28일에도 직제학 표연말 등 대간과 홍문관 부제학 성세명 등 홍문 관원들이 유생을 너그러이 용서하라고 간언하였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1월 30일에는 병조판서 성준 · 호조판서 홍귀달 · 예조판서 성현 · 병조참판 권건까지 나서서 간청했으나 연산군은 강경했다. 

한편 연산군은 유생들을 죄 준 후 4개월 만에 "정거(停擧)한 유생은 과거 응시를 허용하고, 유배 보낸 유생은 그대로 정거하라."고 전교하였다.(연산군일기 1495년 5월 22일)

이제 상소는 마무리된다. 

“그 밖에도 이 무리들이 나를 원망하고 나를 꾸짖은 욕설을 어찌 다 성명하신 전하께 아뢰오리까. 신의 나이 70이 가까운데 젊어서부터 사람들을 해롭게 하거나, 신이 탐욕부리는 일이 없사온데, 유독 김일손·이목·임희재에게만 사사로운 원한이 있을 리 있사오리까. 

신이 이미 죄과를 범했사옵고 또 사람의 훼방을 입었사옵기로, 신경이 착란하여 말의 지루함을 망각하였사오니, 개운하지 못하고 번거롭게 한 죄는 피할 길이 없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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