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회 한치형 · 노사신 · 유자광, 이극돈을 옹호하다

자계서원 (경북 청도군)
자계서원 (경북 청도군)

1498년 7월 19일에 이극돈의 상소를 읽은 연산군은 이극돈의 소(疏)를 추관(推官 중죄인을 심문하는 관원)에게 보이며 "이 소(疏)가 어떠하냐?"며 의견을 물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9번째 기사)   

이러자 한치형, 노사신, 유자광이 아뢰었다.  

먼저 한치형이 아뢰었다.

 "이극돈은 동료로서 신의 집에 자주 내왕하므로 신은 묻기를 ‘《실록》에 선조(先朝)의 허망한 사실을 기록했다고 전해 들었는데, 그런 사실이 있는가?’ 하니, 이극돈은 말하기를 ‘있다.’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장차 어떻게 처리할 작정이냐?’ 하였더니, 극돈은 말하기를 ‘당연히 삭제해 버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대로 할 일이 아니니, 마땅히 공의(共議)해서 계품해야 한다.’ 하였는데, 신과 여러 공신들은 차마 그것을 오래 머물러 두지 못하여 이달 1일 조참(朝參)이 있은 뒤에, 극돈에게 아뢰어야 한다는 뜻을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극돈의 말이 ‘내 뜻도 역시 이와 같다. 그러나 《실록》을 함께 편수한 사람이 관원만이 아니니, 혼자서 아뢰기는 어렵다.’ 하였습니다. 극돈이 이 일을 통분히 여긴 적이 이미 오래이므로, 그 소(疏)에 한 말이 다 옳을 것입니다."

이어서 노사신이 아뢰었다.  

"이극돈이 신의 집에 왔기로, 신은 이 일의 유무(有無)를 물었더니, 극돈은 말하기를, ‘진실로 있다.’ 하므로, 신은 말하기를 ‘마땅히 속히 아뢰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극돈은 통분을 참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는데, 그 계품하려고 한 지가 오래였사오나 다만 그때에 공의를 못했기 때문에 과감하게 못했던 것입니다. 이 소(疏)의 진술한 바는 무고(誣告)가 아닙니다."

유자광도 아뢰었다.  

"이극돈의 소는 신에게 미처 오지 않았습니다마는, 신이 상기(喪期)를 마치고 서울에 와서 이 일을 듣고서 극돈에게 물었더니, 극돈이 말하기를 ‘있다. 아뢰려 한 지가 이미 오래지만, 다만 현재는 공의를 못하였기 때문에 과감히 못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이극돈을 옹호하였다. 이들은 무오사화를 일으킨 주역이었다. 

7월 29일의 <연산군일기>에 실려있는 ’유자광에 대한 평가 내용과 무오 사화의 전말‘을 읽어보자. 여기에는 당시 상황이 잘 나와 있다.  

“당초에 이극돈은 <성종실록> 편찬시 실록청 당상이 되어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보고서 자신의 허물을 덮고자 총제관(摠制官) 어세겸에게 말하였다. 

‘김일손이 선왕(세조를 말함)을 무훼(誣毁)하였는데, 신하가 이러한 일을 보고 상께 주달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나는 그 사초를 봉하여 아뢰어서 상의 처분을 듣는 것이 우리에게 후환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니, 어세겸이 깜짝 놀라서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오래 있다가 유자광에게 상의하니, 유자광은 팔을 내두르며 말하기를, ‘이 어찌 머뭇거릴 일입니까.’ 하고, 즉시 노사신·윤필상·한치형에게 가서  세조께 은혜를 받았으니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말하고 이 일을 말하였으니, 대개 노사신·윤필상은 세조의 총신(寵臣)이요, 한치형은 궁액(宮掖)과 연줄이 닿으므로 반드시 자기를 따를 것으로 요량하여 말한 것인바, 과연 세 사람이 모두 따랐다. 
그래서 차비문(差備門) 안에 나아가 도승지 신수근을 불러내어 귀에다 대고 한참 동안 말한 뒤에 연산군에게 아뢴 것이다.

처음에 신수근이 승지가 될 적에 대간과 시종이 ‘외척이 권세를 얻을 조짐이다.’고 해서 강력히 불가함을 아뢰었으므로, 신수근이 원망을 품고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정이 문신(文臣)들의 손안의 물건이니, 우리들은 무엇을 하겠느냐.’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뭇 원망이 서로 뭉칠 뿐 아니라, 연산군 역시 시기하고 포학하여 학문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더욱 문사(文士)를 미워하여 말하기를, ‘명예만을 노리고 군상을 업신여겨 나로 하여금 자유를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모두 그 무리이다.’ 해서 항상 우울하고 즐거워하지 않아 한 번 본때를 보이려 했지만, 미처 손을 쓰지 못하던 찰나였다. 이 때 유자광의 아뢰는 바를 듣고는, 국가에 충성하는 일이라 생각하여 그를 특별히 우대하고, 명하여 남빈청(南賓廳)에서 죄수를 국문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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