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치일(國恥日) 

매천 황현 
매천 황현 

# 국치일 

8월 29일 국치일(國恥日), 서울 남산 밑 일본인 거주지에는 집집마다 일장기가 게양되고 시내 곳곳에는 오색등이 설치되어 저녁에 있을 등불  행렬을 준비했다. 일본이 동원한 인파 약 6만여 명은 총독부를 비롯한 총독 · 정무총감 · 경무총감 · 군사령관의 관저 앞에서 만세 삼창을 하며 대한제국이 조선으로 바뀐 것을 축하했다.   

이 날 종로 거리의 한국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장사를 하고 흥청거리며 먹고 마시는 평소의 모습을 보였다.  
(김태웅·김대호 지음,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 2019, p 433) 

양계초는 1910년 9월 14일에 <국풍보>에 발표한 「조선 멸망의 원인」에서 이렇게 적었다.    
 
“합병조약이 발표되자 이웃 나라의 백성은 오히려 조선을 위해 흐느껴 울며 눈물 흘렸는데, 조선 사람들은 술에 취해 놀며 만족했다. 더구나 고관들은 날마다 출세를 위한 운동을 하고, 새 조정의 영예스러운 작위를 얻기를 바라며 기꺼이 즐겼다.” (량치차오 지음, 위 책, p 100) 
 
한편 8월 29일에 순종이 칙유했다. 

"짐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臨御)한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정령을 유신하는 것에 관하여 누차 도모하고 갖추어 시험하여 힘씀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만회할 가망이 없으니 밤중에 우려함에 선후책(善後策)이 망연하지라. 

이러한 일이 더욱 심해지면 끝내는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할 공효(功效)를 얻게 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결단을 내려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확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대소신민(大小臣民)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활하고자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순종실록 1910년 8월 29일 )

순종, 참으로 무책임하고 무능하고 황당하다. 
                
# 순국 열사들 

나라가 망했다. 망국에 순국열사가 없지는 않았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권의 ‘순국 의사’ 조에는 순국 의사 29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많을 것이다.  

“금산군수 홍범식, 주러시아 공사 이범진, 승지 이만도, 진사 황현, 판서 김석진, 내관 반학영, 참판 송도순, 정언 정재건, 의관 송익면, 감역 김지수 등.”

소설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의 아버지인 금산군수 홍범식은 목매어 자결했고, 헤이그 특사 이위종의 아버지 이범진은 러시아에서 권총 자결,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이만도는 안동에서 단식하다 순국했다. 작위와 은사금을 거부한 판서 김석진은 음독 자결했으며, 환관 반학영은 파주에 은거 중 할복 자결했다.    

 『매천야록』의 저자인 황현도 9월 10일에 전라도 구례 자택(지금의 매천사)에서 유서와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순국했다. 

“나는 국가에 녹을 먹지 않아 죽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에,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어서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경남일보 주필 장지연은 10월 11일 자 경남일보에 황현의 자결 소식과 함께 절명시 4수를 실었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 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온 세상 이미 가라앉아버렸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일 곰곰이 생각하니   
  글 배운 사람 구실 참으로 어렵구나.”

이로 인해 경남일보는 10월 15일부터 정간되어 10월 25일에 속간되었지만 1914년에 폐간되고 말았다.  

한편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도 여럿이었다. 이회영 6형제는 서울 명동 일대의 가산을 모두 정리한 돈 600억 원을 들고 중국 서간도로 망명하였고, 안동의 이상룡 일가도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갔다. 이건승·정원하·홍승헌 등 강화학파 선비들도 압록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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