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김전·최부·김굉필을 신문(訊問)하라고 명하다

김일손 부친 김맹(남계공) 묘소 (경북 청도군 소재)
김일손 부친 김맹(남계공) 묘소 (경북 청도군 소재)

1498년 7월 19일에 연산군은 윤필상 등과 사초 사건의 관련자들의 처벌에 대해 의논하였다. 연산군은 정석견등의 초사(招辭 범죄사실 진술조서)을 보고 전교하였다. 

"표연말·이원은 진실로 죄가 있거니와, 정석견이 말하기를 ‘김종직의 시집(詩集)을 펴 볼 겨를이 없었다.’ 하였는데, 이 말은 어떠냐? 그 나머지 사건 관계자는 모조리 석방하는 것이 어떠하냐? 이주의 말한 바는 반드시 내용이 있으니 신문(訊問)해 보라."

이러자 윤필상 등이 서로 상의하여 아뢰었다. 

“채수·이창신·김심 세 사람은 당연히 석방해야 합니다. 김전(金詮)은 당연히 신문할 일이 있사오며, 최부(崔溥)는 사초(史草)와 행장(行狀)에 다 제자라 칭하였고, 그 초사(招辭)에 또 이르기를, ‘비록 시집은 수장하였지만 펴 볼 겨를이 없었다.’ 한 것은, 이 말이 바르지 못한 것 같사오며, 사초에 이르기를, ‘김굉필은 더욱 김종직이 애중히 여기는 바 되었다.’ 하였으니, 이 세 사람(김전 · 최부 · 김굉필)은 석방할 수 없사옵니다. 

김전(1458~1523)은 1489년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예안현감·홍문관수찬을 역임하였다. 성종이 유신들에게 피폐한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하도록 했을 때 예안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1496년(연산군 2)에 신용개·김일손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  능력있는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함)한 뒤 전한(典翰)이 되었으며, 춘추관 편수관을 겸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최부 (1454∽1504)는 1478년(성종 9) 148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저작·박사 등을 역임하였다. 1485년에 그는 서거정 등과 『동국통감』 편찬에 참여하여 논(論) 120편의 집필을 담당했는데 그 논지가 명백하고 정확하다 하여 칭찬을 받았다. 1486년에는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했고, 이어서 홍문관교리에 임명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487년(성종 18) 9월에 최부는 제주추쇄경차관(濟州推刷敬差官)으로 제주에 부임했는데, 1488년 1월 말에 부친상을 당하여 나주로 출발했다. 그런데 군관, 향리, 관노 등 43명이 탄 배는 추자도 근처에서 태풍을 만났다. 10여 일을 강풍과 폭우 속에 표류하다가 배는 천신만고 끝에 중국 강남의 절강성 영파부 연해에 도착하였다. 살았다고 환호한 순간 고난이 또 닥쳐왔다. 왜구로 몰린 것이다. 말도 잘 안 통하는 상황에서 최부는  필담으로 조선의 역사와 인물, 예의범절 등 여러 이야기를 하여 혐의를 벗었다.

최부 일행은 중국 관리와 군인들의 호송을 받으며 항주에서 운하를 따라 북경에 이르렀다. 북경에서 그들은 황제를 알현했는데 부친상을 당한 최부는 황제 알현 시에도 상복을 고집하여 명나라 측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이 일은 알현 시에만 잠시 예복을 입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이후 이들은 요동반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귀국했다. 제주도를 떠난 지 6개월 만에 8천여 리의 험난한 길을 돌아온 것이다. 

귀국하자마자 성종은 최부에게 표류기를 올리라고 명하였고, 그는 8일 동안에 써서 임금에게 바쳤다. 이 책이 바로 '표해록(漂海錄)'인데 1488년 1월 30일부터 6월 4일까지의 일기형식으로 되어 있다. 

한편 최부는 대쪽 같은 강직한 선비였다. 사리사욕과 방탕 그리고 무사안일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 간관(諫官)이었다. 그는 훈구대신과 임금의 종실과 외척 그리고 후궁과 환관들의 타락을 신랄하게 공박하였고 심지어 임금의 잘못까지도 낱낱이 거론하였다.

한번은 연산군에게 ‘학문을 게을리하고 오락을 즐기며 국왕이 바로 서 있지 않다.’고 상소하였다. 연산군 3년(1497년) 3월, 사간원 사간(종3품) 시절에 올린 이 상소는 너무나 격렬하여 다음 달에 그가 중국 황제의 생일 축하 사신으로 갈 때 연산군은 관례를 깨고 사간의 직책을 회수하여 버렸다. 

김굉필(1454∽1504)는 『소학(小學)』에 심취해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리었다. 1494년에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해 남부 참봉에 제수되었고, 1496년에 사헌부 감찰을 거쳐 1497년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1610년(광해군 2)에 김굉필은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저작권자 © 한국농어촌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