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우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과 전 학부장
정용우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과 전 학부장

[한국농어촌방송/경남=정용우 서울디지털대학교 부동산학과 전 학부장] 조금 오래 전의 이야기다. 내가 우리 대학 부동산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시에 우리 대학 중국학부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수업을 들을 때이다. 그 수업을 담당하는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인생’(중국 소설 제목으로는 ‘살아간다는 것(活着)’)에 대해 강의한 적이 있었다. 위화(余華)라는 사람이 쓴 소설인데 중국이 1940년대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뚱(毛澤東)이 본토를 차지하고 50년대에 대약진운동과 60년대 문화대혁명을 지나면서 그 한가운데 있는 가족의 삶을 그린 이야기다. 파란만장한 중국의 근현대를 관통한 소설 ‘인생’. 그 인기에 부합하여 1995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장예모 감독, 공리 주연) 수업 중 한 주차를 할애하여 그 영화를 소개해 주셨다. 수업 중 화면으로 보여준 영화인지라 그 화면의 질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내용이 무척 감명 깊어 나는 이 영화를 구입하기 위해 황학시장에 들렀다. 요즘이야 여러 통로를 통해서 원하는 영화를 찾아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기에 오래된 영화의 비디오나 CD를 구입하려면 황학시장 만큼 좋은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가게에 들렀더니 그 비디오가 있긴 한데 부르는 값이 너무 비싸 구입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하여 소설을 구입하여 읽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푸구이(富貴).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에서 가난한 농부로 전락한 푸구이. 가난에 찌들린 삶을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어머니의 한 말씀 - “사람은 즐겁게 살 수 있으면 가난 따윈 두렵지 않은 법이란다.” - 에 힘입어 거친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치열하게 살아간다. 이렇게 삶은 이어지지만 소설에서의 푸구이 인생은 정말 잔혹함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보다 불행한 삶은 없을 듯하다. 눈물 없이는 읽어 내려갈 수가 없다. 고통의 밑바닥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의 기억을 간직하면서 자기 혼자 오래 삼아남아 가족 모두를 자기 손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어 그나마 안심이라고 하는 그가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모두는 우리 생각일 뿐, 소설의 말미에 푸구이는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말한다. “정말 평범하게 살아왔지.” 이 부분이 정말 압권이다. 도대체 어디가 평범하단 말인가.

흔히 우리는 무탈하고 평안한 삶을 평범하다고 한다. 살아가면서 별 고생하지 않고 큰 슬픔 겪지도 않으며 우리가 바라는 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그러한 삶. 그러나 이런 삶은 말하기는 쉬운 것 같으나 꿈꾸기는 오히려 힘들지 모른다. 아니 차라리 이런 삶은 애초부터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지금껏 살아보았지만 파란 없는 삶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기쁨의 높이가 슬픔의 깊이를 만들고 고통의 불길이 쾌락의 물결로 이어진다. 행복과 불행의 교차를 피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삶이다. 다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형태, 그 높낮이가 다를 뿐이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 나약하다. 그러다 보니 고통스런 삶이 다가올 것 같으면 지레 겁부터 먹는다. 나이 들면 여러 가지 병들이 덕지덕지 붙어 다니게 마련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그런 일이 실제로 나에게 일어나면 처절한 고통 속으로 빠져 삶의 잔혹함을 맛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누구나 바라지만 제대로 성공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사람들이 이에 성공할까. 소설 속의 주인공 푸구이처럼 삶의 잔혹함을 평범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소설에서 푸구이는 늙은 소(소 이름도 푸구이다)와 밭을 갈면서 ‘새의 발톱이 나뭇가지를 움켜잡듯’ 가족과 함께한 순간들을 한없이 반추한다. 삶을 치열하게 살아왔으니 돌이킬 추억도 많다. 수없이 삶의 잔혹함을 맛보았지만 그때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을 마음껏 쏟아부었으니 아쉬울 것 없다. 오히려 그의 마음에는 사랑의 기억만 겹겹이 쌓여 갔다. 그래서 보통사람으로서는 견뎌내기 힘든 삶의 잔혹함을 수없이 겪었으면서도 그 추억을 반추하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이런 사람에게는 슬픔의 눈물은 오히려 넓고 풍부한 삶의 의미 그 자체였고 절망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 초탈한 삶이다. 욕심에서 벗어난 삶을 살았기에 그것이 가능했으리라. 욕심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삶에 무슨 특별한 이유나 목적을 갖다 붙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삶의 이유며 목적일 뿐 그 외에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저런 병고에 시달리다 보니 푸구이가 누린 진정한 평범함이 부러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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