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연말의 공초 

창덕궁  옛 지도 (빈청 등 표시)
창덕궁 옛 지도 (빈청 등 표시)

1498년 7월 20일에 표연말이 공초하였다.  

"신의 사초(史草)에 ‘소릉(昭陵)을 꼭 헐지 않아도 되는데 헐었다.’고 한 것은 문종께서 승하하신 뒤에 헐어버렸기 때문이며, 조의제문으로 말하면 글 뜻이 험하고 궁벽하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였사옵고, 김종직의 행장에 도덕과 문장을 극구 칭찬한 것은 김종직의 가슴속에 쌓인 포부를 비록 알리지는 못했을지라도 한 시대 사람들이 다 일컫기 때문에 신이 행장에다 이처럼 칭찬한 것이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0일 1번째 기사)  

먼저 소릉부터 살펴보자. 소릉은 문종의 비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1441) 권씨의 능이다. 현덕왕후는 1441년 7월 23일에 단종을 낳은 후 하루 만에 산후통으로 별세했다. 그녀의 나이 23세였다. 왕실은 9월 21일에 그녀를 안산읍 와리산에 장사지냈는데, 문종은 1450년 7월 1일에 현덕왕후로 추숭하고 능호를 소릉(昭陵)이라 하였다. (문종실록 1450년 7월 1일)

그런데 1457년 6월 21일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당했다. 5일 후인 6월 26일에 세조는 현덕왕후 권씨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삼았고, 이후 소릉(昭陵)을 폐하였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하룻밤에 세조가 꿈을 꾸었는데 현덕왕후가 매우 분노하여, “네가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 너는 알아두어라.” 하였다. 세조가 놀라 일어나니 갑자기 동궁(東宮 덕종)이 죽었다는 기별이 들려왔다. 그 때문에 소릉을 파헤치는 변고가 있었다. 《축수편(逐睡篇)》” 

7월 17일에 연산군은 동·서반(東西班) 3품 이상과 대간·홍문관원 들을 모두 모아 놓고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하여 자세히 전지한 다음에 신하들에게 형량을 의논하여 아뢰라고 전교했다. 

정문형·한치례·이극균·이세좌·노공필 등은 ”대역(大逆)의 죄로 논단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하라고 했고, 유지·박안성·성현 등은 대역부도(大逆不道)하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변종인·권경우·채수 등은 "김종직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율(律)에 의하여 처단하라”고 말했다. 

이인형·표연말은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지칭한 뜻을 살펴보니 죄가 베어 마땅하옵니다."라고 말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7일 2번 째 기사)
   
이처럼 김종직의 문인인 이인형·표연말도 ‘죄가 베어도 마땅하옵니다."고 말한 것이다. 표연말(1449∼1498)은 1492년에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497년에는 대사간, 1498년에는 겸동지성균관사(兼同知成均館事)였다.

그런데 표연말은 7월 18일에 김종직 행장(行狀)을 지었다 하여 국문을 당했다.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표연말이 김종직의 행장을 지었으니, 청컨대 아울러 국문하옵소서."

이러자 연산군은 ‘가하다.’고 전교하였다.

표연말이 공초하였다.

"신은 함양에 사옵는데,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와서 신이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신이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경의(經義)에 의심나는 곳을 질문하였으며, 그 문집은 신이 보았으나 단 조의제문은 글의 뜻을 해득하지 못했으며 그 시집(詩集)은 당시에 보지 못했으므로 이른바 ‘육군(六君)’이 어느 사람을 지적한 것인지 알지 못하옵니다. 

다만 신이 김종직의 행장을 지으면서 ‘공의 도덕과 문장은 진실로 일찍이 현관(顯官)으로 등용되어 사업에 베풀었어야 할 것인데 어버이를 위하여 외직(外職)을 빌어 오래 하리(下吏)에 머물러 있었고, 늦게야 임금의 알아줌을 입어 빨리 육경(六卿)으로 승진되어 바야흐로 크게 쓰이게 되었는데, 공의 병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두 번 다시 조정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우리 도의 불행이 아니랴! 의논하는 자는, 「공이 조정에 선 지 오래지 않아서 비록 큰 의논을 세우지 못하고 큰 정책을 진술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 세상의 사문(斯文)의 중망을 짊어지고 능히 사도(師道)로서 자처하여 인재를 작성함에 있어서는 근세에 한 사람일 따름이다.’라고 썼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8일 3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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