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세겸·이극돈 등 실록청 당상들이 변명 상소를 올리다

창덕궁 희정당 전경
창덕궁 희정당 전경

1498년 7월 20일에 심문을 담당하는 추관(推官)이 최부가 김종직의 문집을 소장한 지가 3년에 이르렀는데도 초사(招辭)에 ‘겨를이 없어 펴 보지 못했다.’ 한 것은 사기(詐欺)이며, 홍한과 표연말의 사초(史草)는 아울러 속셈이 있는데도, 표연말은 또 ‘처음에 조의제문의 뜻을 해석하지 못했다.’ 한 것은 바르지 못한 말이며 김종직을 칭찬한 것도 역시 반드시 속셈이 있다고 여기어 각각 형장 심문을 한 차례씩 하였는데, 모두 승복하지 아니하였다.  

또 실록청 편수관 강경서가 ‘권오복·권경우의 사초를 보지 못했다.’고 말한 것도 사기라고 하여 한 차례 형장 심문을 받았는데 강경서는 불복하였다. 이윽고 실록청 편수관 이수공(李守恭)이 권경유·권오복의 사초를 기재한 것은 반드시 속셈이 있다고 하여 한 차례 형장 심문을 받았으나 이수공 역시 불복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0일 1번째 기사)  

강경서(姜景敍 1443∽1510)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1477년에 급제하여 1497년에 사헌부 집의가 되었고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여 실록청 편수관을 하였다. 강경서는 남효온·권경유(權景裕) 등과 더불어 사장(詞章)·정사(政事)·절의·효행 등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수공(1464~1504)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영의정 이극배의 손자이다.    1488년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1494년에 형조정랑·홍문관 교리를 하였다. 1497년 장령·응교(應敎)를 거쳐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하였고, 실록청 편수관이었다.   


아울러 정분은 바로 난신(亂臣)인데, 정여창이 그를 ‘조용히 죽음에 나아갔으니 취(取)할 만하다. 마땅히 전(傳)을 지어야겠다.’ 한 것은 속셈이 있다 하여, 정여창을 한 차례 형장 심문을 했다. 

정여창이 공초하였다.  

"같은 때의 정승이었으나 김종서와 황보인은 반역을 도모한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모두 참형(斬刑)에 처했는데, 정분만은 전라도 광양으로 귀양가서 종말에 단지 교형(絞刑)에 처했으며, 정분이 또한 형(刑)에 임하자 말하기를 ‘죽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명절(名節)은 다름이 있다.’ 하였사온즉, 김종서 등과 더불어 공모하지 않았는데 죄 없이 죽은 것 같으므로, 마땅히 전(傳)을 지어야 하였기에 써서 (김일손에게) 보내 준 것입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0일 2번째 기사)   

7월 21일은 국문 10일이 되는 날이었다. 이 날 실록청 당상 어세겸·이극돈·유순·홍귀달·윤효손·허침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변명하였다.  

어세겸은 좌의정으로 실록청 감관사(監館事)이고, 의정부 좌찬성 이극돈, 예문관 제학 유순, 홍문관 대제학 홍귀달, 의정부 우참찬 윤효손은 실록청 지관사(知館事)이고 동지중추부사 허침은 실록청 동지관사(同知館事)였다.    

" (...) 근일에 사관(史官)의 부도(不道)한 말을 늦게야 계품(啓稟)하였으니 달갑게 부월(斧鉞)의 베임을 받아야 합니다마는, 구구한 마음을 머금고 있을 수 없사옵기로, 삼가 아래와 같이 진달하옵니다.

대체로 실록을 수찬하는 예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시정기(時政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와 각 사(司)의 등록(謄錄)으로 무릇 상고할 만한 문서라면 모두 다 주워 모아서 연대(年代)를 나누고 방(房)을 나누어 각기 근정(斤正)하여 편집하게 하고, 여러 신하의 사초는 연월일에 따라 전문(全文)을 바로 써서, 그 사이에 넣으므로 편언척자(片言隻字 한 두 마디의 짧은 말과 글)라도 가감(加減)이 있을 수 없사오며, 편성하여 도청(都廳)에 올리면 도청은 각방(各房)의 당상관을 소집하여 함께 삭제 또는 채택을 의논해서 비록 적은 일이라도 적실하면 그대로 두고, 아니면 삭제하옵는데 하물며 국가의 대사에 있어서입니까.

신 등이 찬술한 바는 이미 함께 의논하여 삭제하였습니다. 신 등은 취사(取捨)한 것은 하나가 아니므로 지금 사초(史草)의 전문(全文) 두 조문을 별지(別紙)에 쓰고 또 인출된 정본(正本) 두 장에 표를 붙여 아뢰오니, 만약 보아주시오면 신 등의 버리고 취한 흔적을 환히 짐작하실 것이옵니다.

듣자오니, 어제 오방(五房)의 낭청(郞廳) 강경서·이수공이 권오복 등의 사초(史草)를 취한 것 때문에 모두 형장 신문을 받았다 하는데, 이것은 신 등이 미처 함께 의논하지 못한 바입니다. 강경서 등이 어찌 제 마음대로 취할 수 있사오리까? 신 등은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아뢰오니, 바라옵건대 보아주시옵소서."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1일 1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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