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이유청 · 민수복 등 대간들을 또다시 신문하다

창덕궁 선정전 입구
창덕궁 선정전 입구

1498년 7월 21일(국문 11일째)에 실록청 당상 어세겸·이극돈·유순·홍귀달·윤효손·허침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변명하였다.  

" (...) 듣자오니 어제 오방(五房)의 낭청(郞廳) 강경서·이수공이 권오복 등의 사초(史草)를 취한 것 때문에 모두 형장 신문을 받았다 하는데, 이것은 신 등이 미처 함께 의논하지 못한 바입니다. 강경서 등이 어찌 제 마음대로 취할 수 있사오리까? 신 등은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아뢰오니, 바라옵건대 보아주시옵소서."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1일 1번째 기사)

이러자 연산군은 추국관들에게 "이 말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그들의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통 일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낭청이 만약 보았다면 당연히 도청(都廳)에 고했어야 할 것이온데, 지금 그렇지 못했으니, 그 사정을 신문하지 아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연산군은 ‘알았다.’고 하면서 어세겸 등에게 전교하였다.  

"내가 경(卿) 등을 그르다 하는 것은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와서 보고하지 아니했기 때문이며, 강경서·이수공을 그르다 하는 것은 그들이 이와 같은 부도(不道)한 일을 보았다면 마땅히 도청(都廳 실록청)에 고하여 함께 의논해서 삭제해 버렸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날 연산군은 대간(臺諫)을 다시 국문하라고 명했다. 사헌부 집의(執義)이유청·사간원 사간(司諫) 민수복·유정수·조형·손원로·신복의·안팽수·이창윤·박권 등이 공초하였다. 
 
"신 등이 망령된 의논을 했을 따름이옵고, 딴 사정은 없사옵니다."  

 7월 17일에 연산군이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한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을 때 대부분이 능지처참이나 참형의 의견을 제시했는데 이유청·민수복 등 대간들은 가벼운 의견을 내놓았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말이 많이 부도(不道)하오니, 죄가 베어도 부족하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작호(爵號)를 추탈하고 자손을 폐고(廢錮)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이러자 연산군은 어필(御筆)로 이유청과 민수복 등의 논의에 표시를 하고,  "김종직의 대역이 이미 나타났는데도 이 무리들이 이렇게 의논하였으니 이는 김종직을 비호하려는 것이다. 어찌 이와같이 통탄스러운 일이 있느냐. 그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잡아다가 형장 심문을 하라." 고 명했다. 

이때 여러 재상과 대간과 홍문관원이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나장(羅將) 10여 인이 철쇄(鐵鎖)를 가지고 일시에 달려드니, 재상 이하가 놀라 일어서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곧바로 끌려 나간 이유청 등은 그 자리에서 형장 신문을 당하고 형장 30대를 맞았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7일 2번째 기사)

이로부터 4일 뒤인 7월 21일에 이유청 등은 딴 사정이 없었다고 다시 진술한 것이다. 

이들의 진술에 연산군이 전교하였다.  

"대간 등이 스스로 이르기를, ‘임금과 더불어 시비를 다툰다.’ 하고, 또 이르기를, ‘선(善)을 진술하고, 사(邪)를 막아 버리는 것을 공(恭)이라 이른다.’ 하였지만, 큰일을 당하여 그 의논이 이와 같으면 어찌 옳다 하겠는가. 지금 만약 다시 신문한다면 마땅히 형장 신문을 해야 하겠는데,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느냐?"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비록 다시 형장 신문을 한다할지라도 어찌 딴 사정이 있사오리까. 다만 망령되게 사료한 것뿐일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이 진술에 의거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다시 연산군이 전교하였다.  

"율(律)에 참조하라. 또 이 무리들이 설사 살길을 얻었을지라도 특지(特旨)가 있기 전에는 다시 서용(敍用)하지 말라."

 윤필상 등이 장 1백 대에 유배 3천 리로 할 것을 아뢰니, 전교하기를, 

"큰 죄가 결정되는 것을 기다려서 법대로 처단하라."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1일 2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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