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반·권오복·권경유의 공초

연산군 묘 입구 (서울 도봉구 방학동)
연산군 묘 입구 (서울 도봉구 방학동)

7월 21일에 허반(許磐)이 윤씨의 일에 대하여 또다시 공초하였다. 

"윤씨의 일은 여종 신월(新月)의 말이 ‘상을 내리는 것이 편벽되게 중하고, 전장과 노복을 많이 내려 주었으며, 집까지 내려주었고 대소의 거둥에 있어서도 반드시 어가(御駕)를 수행하게 하니, 의심스러울 일이다.’ 하므로, 신도 역시 의심이 나서 김일손에게 말해 주었는데, 김일손이 또 부연하여 《실록》에 실은 것입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1일 3번째 기사) 
 
허반의 공초는 20세에 요절한 성종의 부친인 의경세자(1438∽1457 덕종으로 추존)의 후궁인 소훈 윤씨(昭訓尹氏)에 대한 소문이었고, 이는 시아버지(세조)와 며느리(소훈 윤씨)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7월 22일은 국문 12일째였다. 이날 추관들은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관련하여 권오복 · 권경유를 심문하였다. 권오복이 공초하였다.  

"지난 을묘년(乙卯 1495년)에 김일손이 충청도 도사(都事)가 되어, 서울에 왔으므로 신은 그 집을 찾아가 함께 자면서 이야기하였사온데, 김일손이 김종직의 문집을 보여 주기에 서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논했습니다. 신의 원정(原情 사연을 하소연함)은 다 사초에 있사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2일 1번째 기사)   

이 날 예조(禮曹)에서 조정 관리들이 가지고 있는 김종직의 문집을 모조리 압수하여 아뢰니, 연산군이 전교하였다.  

"대궐의 정원에서 불사르되 뭇 죄수를 모아다가 보여, 그 저술한 바도 차마 남겨둘 수 없는 의도를 알게 하라."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2일 2번째 기사)    

이어서 추관이 권경유의 초사(招辭 진술조서)를 정리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신의 사초에 ‘김종직이 염정(廉靜)하고 충화(沖和 조화)하여 사문(斯文)으로써 자기 책임을 삼았으며, 일찍이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충의가 격렬하여 보는 자가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문장은 다만 그 여사(餘事)이다.’라고 기재한 것은, 김종직의 문장에 대하여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서는 그보다 나은 자가 없다.’ 할 뿐더러 조위가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적에 그 시문을 신에게 부탁하여 뽑으라 하므로 신이 인하여 조의제문을 보았는데, 항우(項羽)가 영포(英布)로 하여금 비밀리에 의제(義帝)를 쳐 죽이게 하였으니 천하의 악이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김종직은 본시 충의에 불타는 사람이므로 신의 생각에는 의제(義帝)를 위하여 조문(弔文)을 지은 것이라 생각하고, 마침내 ‘충의가 격렬하여 보는 자가 눈물을 흘린다.’고 말했습니다."

이 초사를 본 권경유는 초사의 ‘천하의 악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는 구절 아래에 ‘비록 만세 후라도 통분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라는 말을 추가하여 달라고 청했다. 

추관이 듣지 아니하니, 권경유는 붓을 던지고 서명(署名)을 거부했다. 급기야 권경유는 고문을 당했는데 그는 눈을 감고 아프다고 외치지 않고 끝까지 굴복하지 아니하니, 연산군은 듣고서 ‘권경유는 강포(强暴)한 자다.’라고 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2일 3번째 기사)  

이어서 추관들이 권오복을 형장 신문하니, 권오복이 공초하였다.  
"김종직이 의제(義帝)를 노산군(단종)에 비유하여 조문을 지었기 때문에 신도 사초에 그렇게 기재하였던 것이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2일 4번째 기사)   

이윽고 윤필상 등이 이의무·신용개·김전·정희량을 석방할 것을 청하였는데, 연산군은 명하여 신용개만을 석방하게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2일 5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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