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목과 성중엄의  공초 

연산군 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연산군 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국문 13일째인 1498년 7월 23일에 연산군은 김종직이 저술한 『점필재집(佔畢齋集)』을 불사르라고 명령하였다.
   
7월 24일에 이목이 공초하였다. 
        
“신이 김일손에게 준 편지에 ‘형(兄)의 사초는 마침 동방(同房) 성중엄의 손에 있다.’고 한 것은, 신은 첫째 방이고 성중엄은 네째 방 낭청이라 한 방에서 함께 거처하지만, 김일손의 사초는 성중엄의 방에 나뉘어 있기 때문에 그리 쓴 것이옵니다. 

‘당상이 날짜에 따라 기사(記事)를 아니한 것으로 말을 삼아 책(冊)에 쓰려고 아니하므로, 나는 조석으로 성중엄을 문책(問責)하니, 성중엄은 오히려 계운(季雲 김일손의 자)의 사초가 한 자라도 기록하지 못할까 걱정했다.’고 한 것은 신이 중엄에게 묻기를, ‘일손의 사초가 네 방에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다. 다만 당상 윤효손이 날짜에 따라 기사하지 아니해서 어느 날 아래에 편입해야 될는지 모르겠다.’ 말하고, 이극돈 역시 윤효손에게 ‘김일손의 사초는 사람에게 보이지 말라.’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뜻이 모두 책에 쓰고자 아니한 것이기 때문에, 신이 성중엄에게 책하기를, ‘비록 날짜에 따라 기사는 안 되었을지라도 만약 당연히 써야 할 일이면 써야 한다.’ 하자, 성중엄은 말하기를, ‘나 역시 기록하고는 싶으나 다만 날짜에 따라 쓰지 아니하여 편차(編次)하기가 어렵다.’ 하고, 또 노상 펴 보면서 말하기를, ‘이미 익히 보았다.’ 하기 때문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윤효손이 매양 나에게 묻기를, ‘김모는 어떠한 사람이냐?’ 하고, 윤이 형의 사초를 본 뒤 말하기를 ‘나는 김모가 이러한 인걸인 줄은 알지 못했다.’고 한 것은 윤효손이 일찍이 신에게 묻기를 ‘일손은 어떠한 사람인가?’ 하였고, 또 그 사초를 보고서 말하기를, ‘문장에 능한 자다’ 하였기 때문에 이른 것이옵니다. 

‘찬성 이극돈이 윤효손을 시켜 사초를 숨기게 하였으니, 그 섶을 안고 불을 끄는 어리석음과 비슷하다.’고 한 것은 이극돈이 윤효손으로 하여금 그 사초를 함봉하고 사람에게 보이지 말라 하였지만, 사초란 끝내 숨길 수 없는 것인데 이극돈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이른 것이옵니다. 

‘매양 원하는 것이 선왕의 《실록》을 쓰고 여가로 밤에 돌아가 등불을 달아놓고 당세의 일을 써서, 형의 사업을 만분의 1이라도 하고 싶다.’고 한 것은, 신이 《춘추(春秋)》를 겸하여 기사(記事)로써 직업을 삼고 있사온데, 일손의 기사가 세밀하고 자상하므로 신도 역시 일손에 비해 만에 하나라도 기주(記注)하고 싶기 때문에 이른 것이오며, 

‘도리어 중한 앙화를 받는 것이 아닌가?’ 한 것은, 예로부터 사관(史官)들이 직필(直筆)로써 화를 받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른 것입니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4일 2번째 기사)

 7월 12일에 의금부 관원 홍사호 등이 김일손의 집에서 이목이 김일손에게 보낸 편지를 찾아냈다. 이목의 편지를 읽어보자 

"목(穆)이 실록청에 출사(出仕)한 것이 이제 수십 일이 되었습니다. 형의 사초(史草)가 마침 동방(同房)인 성중엄의 손에 있었는데, 당상이 날마다 쓰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삼아 모두 책(冊)에 쓰려고 하지 않는다 하기에, 내가 아침저녁으로 성중엄을 문책하니, 중엄도 사람이 군자(君子)이기 때문에, 마음에 감동되어 오히려 계운의 사초가 한 자라도 기록되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의 당상은 윤효손인데, 윤은 매양 나에게 묻기를, ‘김 아무는 어떠한 사람이냐?’고 했습니다. 윤이 형의 사초를 모두 보고나서 하는 말이 ‘나는 김 아무가 이렇게까지 인걸인 줄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찬성 이극돈이 윤으로 하여금 숨기게 하였으니, 섶을 안고 불을 끄려고 하는 어리석음과 비슷한 것입니다. 

나는 오래 성덕(聖德)을 입어(...) 요사이 외람하게도 조정에서 겸춘추(兼春秋)에 발탁함을 입었으니, 매양 소원이 《성종실록》을 만드는 여가에 밤에 돌아와 등불을 달고 당세의 일을 써서, 만에 하나라도 형의 업(業)에 대해서 다른 날 죽은 뒤의 도움이 되었으면 하여, 다만 이 가부를 논해 주기만 바랐는데, 망령된 계획이 도리어 중한 앙화만을 받게 되었으니, 어찌하겠습니까.

(...) 진실로 망언인 줄은 알지만 형의 회포를 풀어 드리려는 마음에서 모든 언사를 피하지 않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2일 3번째 기사)   

이목의 공초에 이어 성중엄도 공초하였다. 
     
“이목이 공초한 것은 실상은 다릅니다. 이목이 ‘김일손의 사초가 네 방에 있느냐.’고 묻기에, 신은 ‘내 방에 나누어져 있다.’고 답하였을 뿐 다른 말을 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목에게 말하기를, ‘일손의 사초는 상에 관련되어 기록해서는 안 될 일이 많이 기록되었다.’ 하였더니, 이목이 말하기를, ‘네가 만약 기록하지 않는다면 나는 마땅히 네가 기록하지 아니한 사실을 써 놓겠다.’ 하였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4일 3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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