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6일 밤에 큰바람이 불고 큰비가 물 쏟듯이 내리다

창덕궁 선정전과 희정당 전경
창덕궁 선정전과 희정당 전경

1498년 7월 25일, 김일손의 사초 사건과 관련하여 윤효손, 김일손, 권경유가 공초하였다. 

먼저 윤효손이 공초했다. 그는 이목의 공초가 사실임을 시인하였다. 

"이목이 공초한 바, ‘김일손은 어떠한 사람인가?’ ‘문장에 능한 자다.’ 등의 말은 처음에는 해가 오래되어 능히 기억을 못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실로 신이 말한 것이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5일 7번째 기사)

이윽고 김일손이 공초하였다.

“신이 내섬 직장(內贍直長)이 되었을 적에 내섬 정(內贍正) 허계와 이종준과 함께 앉았는데, 허계가 이종준에게 묻기를 ‘자네 장인은 잘 계시는가? 높은 절개를 지닌 분이시다.’ 하므로, 신은 이종준에게 묻기를 ‘무엇 때문에 높은 절개가 있다 이르오?’ 하자, 이종준이 대답하기를 ‘병자년 이후로 과거를 보지 않아 절개가 높다 하는데, 그 실상인즉 그렇지 않다. 여러 번 훈도(訓導)의 직을 받았다.’ 하였습니다. 

그 후에 신은 시(詩)를 이종준의 장인인 권작(權綽)에게 보냈는데, 

세상에 자양(紫陽 주자 朱子)의 붓이 없으니, 
누가 진(晉)의 《춘추》를 기록할까

이는 대개 권작을 도연명(陶淵明)에 비한 것입니다. 
다른 날 이종준이 신에게 말하기를, ‘네 시(詩)는 어찌 망령된 말을 하느냐?’ 하므로, 신은 답하기를, ‘허계의 말과 네 말을 듣고서 시를 그처럼 지은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후 사고(史藁)를 찬수하면서 졸(卒)한 해를 쓰고 사적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윽고 형장 심문이 있었고, 권경유가 공초하였다.  

"저의 생각에는 김종직이 의제(義帝)를 위하여 조문(弔文)을 지었을 뿐, 다른 사정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5일 8번째 기사)  

7월 26일은 국문 16일째였다. 이 날 연산군은 승정원의 일에 대해 비밀을 지킬 것을 승지 등에게 전교하였다. 

"승정원은 근밀(近密)한 곳이라 무릇 내고 들이는 공적인 일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 새로 제수된 승지들은 승정원의 예를 알지 못할 것이니, 나의 뜻을 각기 몸 받도록 하라. 그리고 주서청(注書廳)에 조관(朝官)들이 어지럽게 출입하므로 모든 공사를 꼭 보고 알게 되니, 이제부터 출입을 못하게 하라.“

연산군은 대체로 김일손이 국사(國事)를 헐뜯은 것을 깊이 미워한 것이고, 또한 외부 사람들이 김일손의 일을 알지 못하게 하려는 까닭으로 이런 분부를 내린 것이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6일 2번째 기사) 

연산군이 언급한 새로 제수된 승지들이란 7월 25일에 단행한 인사로 임명된 승지들이었다. 즉 성세명이 승정원 좌승지로, 정미수가 우승지로, 홍식이 좌부승지로, 김영정이 우부승지로, 이세영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된 것이다. 아울러 연산군은 김계행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권주를 홍문관 부제학으로, 윤희손을 직제학(直提學)으로, 이일건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안윤덕을 사간원 사간으로, 김숙정·이세인을 사헌부 장령으로,권세형·정인인을 지평으로, 최세걸을 사간원 헌납으로, 조치우·권홍을 사간원 정언으로, 권달수를 홍문관 부수찬으로 임명하였고, 유자광을 겸 도총부 도총관(兼都摠府都摠官)으로 삼았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5일 9번째 기사)

이어서 윤필상 등은 사초 사건 관련자 김일손·권오복·권경유 등의 죄목을 논하여 서계하였고, 연산군은 사초 사건 관련자들의 처벌에 대하여 전교하였다. 또한 윤필상 등이 사초 사건 관련자들의 유배지와 사초 사건에 연루된 종친의 처벌 문제에 대해 아뢰었다. 이러자 연산군은 사초 사건에 대한 교서를 정성스럽게 지을 것을 명하였다. 이제 김일손의 사초와 관련된 자들에 대한 처벌만 남았다.  

하늘도 무심했을까. 26일 밤에 큰바람이 불고 큰비가 물 쏟듯이 내렸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6일 1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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