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김일손 등을 벤 것을 종묘사직에 알리다

의금부 터 (서울 종각역 1번 출구)
의금부 터 (서울 종각역 1번 출구)

1498년 7월 26일에 연산군은 "교서(敎書)를 지을 때는 조사(措辭 문장 선택과 배열)를 잘해서 신인(神人)이 모두 감동하도록 해야 한다."고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6일 7번째 기사)

7월 27일에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벤 것을 종묘사직에 알리고, 백관의 하례를 받고 중외(中外)에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7일 1번째 기사)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세조 혜장대왕(世祖惠莊大王)께서 신무(神武)의 자질로 국가가 위의(危疑)하고 뭇 간신이 도사린 즈음을 당하여, 침착한 기지와 슬기로운 결단으로 화란(禍亂)을 평정시키시니 천명과 인심이 저절로 귀속되어,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이 우뚝 백왕(百王)의 으뜸이었다. 그 조종(祖宗)에게 빛을 더한 간대(艱大)한 업적과 자손에게 끼친 연익(燕翼)의 모훈(謨訓)을, 자자손손 이어받아 오늘에까지 이르러 아름다웠었는데, 뜻밖에 간신 김종직이 화심(禍心)을 내포하고, 음으로 당류(黨類)를 결탁하여 흉악한 꾀를 행하려고 한 지가 날이 오래되었노라.

그래서 김종직은 항우가 의제(義帝)를 시해한 일에 가탁하여, 문자에 나타내서 선왕(先王)을 헐뜯었으니, 그 하늘에 넘실대는 악은 불사(不赦)의 죄에 해당하므로 대역(大逆)으로써 논단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였고, 그 도당 김일손·권오복·권경유가 간악(姦惡)한 붕당을 지어 동성상제(同聲相濟)하여 그 글을 칭찬하되, 충분(忠憤)이 경동한 바라하여 사초에 써서 불후(不朽)의 문자로 남기려고 하였으니, 그 죄가 김종직과 더불어 과(科)가 같으므로 능지처사(凌遲處死)하게 하였노라.

그리고 김일손이 이목·허반·강겸 등과 더불어 없었던 선왕의 일을 거짓으로 꾸며대서 서로 고하고 말하여 사(史)에까지 썼으므로, 이목·허반도 아울러 참형(斬刑)에 처하고, 강겸은 곤장 1백 대를 때리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여 극변(極邊)으로 내쳐 종으로 삼았노라.

그리고 표연말·홍한·정여창·무풍정(茂豊正) 총(摠) 등은 죄가 난언(亂言)에 범했고, 강경서·이수공·정희량·정승조 등은 난언임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았으므로 아울러 곤장 1백 대를 때려 3천 리를 밖으로 내치고, 이종준·최부·이원·이주·김굉필,박한주·임희재·강백진·이계맹·강혼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을 맺어 서로 칭찬하였으며, 혹은 국정을 기의(譏議 원망하는 의논)하고 시사(時事)를 비방하였으므로, 임희재는 곤장 1백 대를 때려 3천 리 밖으로 내치고, 이주는 곤장 백 대를 때려 극변(極邊)으로 부처(付處)하고 이종준·최보·이원·김굉필·박한주·강백진·이계맹·강흔 등은 곤장 80대를 때려 먼 지방으로 부처함과 동시에 내친 사람들은 모두 봉수군(烽燧軍)이나 정로한(庭爐干)의 역(役)에 배정하였고, 

수사관(修史官) 등이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않았으므로 어세겸·이극돈·유순·윤효손 등은 파직하고, 홍귀달·조익정·허침·안침 등은 좌천시켰다. 그 죄의 경중에 따라 모두 이미 처결되었으므로 삼가 사유를 들어 종묘사직에 고하였노라.

돌아보건대 나는 덕이 적고 일에 어두운 사람으로 이 간당(奸黨)을 베어 없앴으니, 공구한 생각이 깊은 반면에, 기쁘고 경사스러운 마음 또한 간절하다. 

그러므로 7월 27일 새벽을 기하여 강도·절도와 강상(綱常 사람이 지켜야할 도리)에 관계된 범인을 제외하고는 이미 판결이 되었든 판결이 안 되었든 모두 사면하노니, 감히 유지(宥旨)를 내리기 이전의 일로써 서로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를 다스릴 것이다.

아! 인신(人臣)이란 난리를 만들 뜻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부도(不道)의 죄가 이미 굴복하였으니, 뇌우(雷雨)가 작해(作解)(군자가 죄지은 자를  관대하게 사면함 : 『주역(周易)』 해괘(解卦)에 나옴)하듯이 마땅히 유신(惟新 새롭게 생각함)의 은혜에 젖도록 하겠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이 뜻을 납득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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