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 ·권오복 · 권경유, 능지처사 당하다

서울 종로 광통교
서울 종로 광통교

무오사화의 희생자는 모두 51명이었다. 사형은 6명(11.8%), 유배 31명(60.8%), 파직 · 좌천이 14명(27.4%)이었다. 사형은 「조의제문」을 지은 김종직(1431∽1492)이 부관참시(剖棺斬屍 죽은 사람의 관을 갈라, 시체를 꺼내 목을 베는 형벌)되었고, 「조의제문」을 성종실록에 실으려고 했던 김일손·권오복·권경유는 능지처사(凌遲處死)되었으며, 이목과 허반은 참형(斬刑) 당했다.  

유배는 참형을 면한 강겸, 난언(亂言)을 범한 표연말·홍한·정여창·무풍정(茂豊正) 총(摠)등과 난언임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은 강경서·이수공·정희량·정승조 등과, 김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을 맺은 박한주·임희재·강백진·이계맹·강혼·이주·이종준·최부·이원·김굉필·박한주등, 그리고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한 가벼운 처벌 의견을 낸 사헌부 장령 유정수, 집의 이유청, 사간원 사간 민수복, 박권, 손원로, 이창윤, 안팽수, 조헌 등 대간(臺諫) 9명이 유배되었다. 또한 실록 편수에 참여한 편수관 중 어세겸·이극돈·유순·윤효손은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않아 파직되었고, 홍귀달·조익정·허침·안침은 좌천되었다. 

연산군이 처벌한 죄목은 붕당(朋黨)과 난언(亂言)과 능상(凌上)이었다.  
붕당은 김종직 일파가 사제관계로 뭉쳐 반역을 저질렀다는 것이고, 
난언은 유언비어를 날조했다는 것이며, 능상은 임금을 비롯한 윗사람을 능멸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난언은 대부분 세조와 관련된 반인륜적인 처사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세조가 맏아들 의경세자의 후궁 권귀인을 넘보았다는 추문, 단종의 모친인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낸 소문, 영월로 유배 간 노산군(단종)을 죽여 까마귀밥이 되게 했다는 풍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소문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것이었고 김일손은 「성종실록」 사초에 수록하여 역사 바로잡기를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면 희생자 51명의 구성을 살펴보자. 김종직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인물은 24명(47.1%)이고, 대간이 9명(17.6%), 실록 편찬에 관련된 자   8명(15.7%), 대신과 종친이 10명(19.6%)이었다. 즉 김종직 일파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절반을 넘지 않았다. 특이한 것은 고변자 이극돈도 파직 당한 것이다. 

한편 1498년 7월 26일 밤에 큰바람이 불고 큰비가 물 쏟듯이 내렸다.(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6일 1번째 기사)

7월 27일 오시(午時 11-1시 사이)에 김일손 ·권오복 · 권경유는 서울 종로의 광통교(廣通橋) 저잣거리에서 조정 관리들과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능지처사(凌遲處死)당했다.  

능지처사는 산 채로 온몸을 도막 내고 칼로 썰어 천천히 죽이는 극악무도한 죄인에게만 가하는 극형이다. 능지(陵遲)는 원래 경사가 완만한 구릉을 천천히 올라간다는 뜻으로, 대체로 팔다리와 어깨, 가슴을 잘라 내고, 마지막에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어 죽였다.

7월 26일에 연산군은 이렇게 전교했다.    

"김일손 등을 벨 적에는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가서 보게 하라. 최근에  경상도와 제천(堤川) 등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도 바로 이 무리들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옛 사람은 지진이 임금의 실덕에서 일어난다 하였으나, 이번의 변괴는 이 무리의 소치가 아닌가 여겨진다. 유생들이 성균관이나  사학(四學)에 다니면서 단지 옛글만 보았지, 조정의 법도를 알지 못하면서 조정의 정사를 비방하니, 어찌 이와 같은 풍조가 있을 수 있는가?  비록 이런 무리가 학문이 뛰어나다 해도 행실이 이러할진대, 도리어 학식이 없는 사람만 못하다.”(연산군일기 1498년 7월 26일 4번째 기사) 
이 날 허반과 이목도 목을 베어 죽이는 참형(斬刑)을 당했다. 

김일손(1464∽1498)이 34세에 능지처사 되자, 경상도 청도군 김일손 생가의 운계천의 물이 사흘 밤낮으로 붉은 핏빛으로 흘렀다. 

김일손의 시신은 이틀 동안 저잣거리에 뒹굴어져 있다가 29일에야 경기도 양주군 남쪽 50리에 있는 석교원에 임시로 안치하였다.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으로 김일손은 억울한 죄가 사면되고 관직이 회복되었다. 이어서 10월 24일에 양주 석교원의 임시묘를 충청도 목천의 적성산 아래로 개장하였고, 1508년 8월에 목천의 묘를 지금의 묘소인 경상도 청도군 수야산 언덕에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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